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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일주일에 한 번, 데이트 합시다
  • 입상자명 : 서 보 현 울산 경의고교 2-2
  • 입상회차 : 5회
  • 소속 : 청소년부
  • 장르 : 청소년부 글쓰기

“보현아! 일나라. 산에 올라가자!”

오늘은 날씨가 무척이나 화창한 일요일. 일요일에 10분만이라도 더 자고 싶은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할머니는 나의 이불을 잡아끄신다.

“아, 할머니! 쪼금만 더 자께. 쪼금만 더….”

“안된다! 니 저번에도 그래놓고 2시간이나 잤다 아이가! 오늘은 가서 느그 아바이 줄 나물도 뜯어 와야 되고, 나무 심어논 것도 살펴봐야 되고 할 일이 많타! 얼릉 가자, 할매가 산딸기 따 주꾸마.”

“아이 참, 알겠다. 세수 좀 하고.”

나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깨닫고,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매주 일요일은 할머니와 내가 데이트를 갖는 날이다. 체력도 단련하고, 할머니와의 사랑도 돈독하게 지킬 수 있는, 돈이 들지 않는 데이트. 그런 데이트가 어디 있냐고? 왜 없겠는가. 눈만 돌려보면 떡하니 자리잡은 곳곳의 산들이 바로 그런 데이트 코스인데.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인 울산 언양은, 미나리와 한우로 유명한 곳이다. 다른 지역에도 있음직한 이런 것들이 특산품이 된 이유는 뭐니뭐니 해도 언양이 산의 정기를 듬뿍 받았기 때문이라고 할머니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신다. 좋은 산이 가꾸는 좋은 풀을 뜯어먹은 소들은 당연히 좋은 육질을 자랑할 수밖에 없을 테고, 그 좋은 산에서 내려오는 좋은 물로 길러지는 미나리들은 좋을 수밖에 없다는 게 할머니의 설명. 물론 나도 할머니의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부산에서 살았을 때에는 환절기만 되면 달고 다니던 감기와 비염이 여기 온 후부터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으니까.

우리 할머니는 한 평생 산과 나무와 바람과 햇살을 친구삼아 살아오신 분이다. 어릴 땐 시장에 냉차 팔러 가신 어머니가 언제 오시나 하며 산 친구 등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았고, 결혼해서는 할아버지의 당뇨를 고치기 위해 나무 친구 줄기 밑둥을 샅샅이 뒤지며 여러 약초를 캐오셨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다 큰 손녀와 함께 일주일에 한 번씩 친구들이 잘 있나, 안부를 물으러 가신다.

“할머니, 이건 뭐꼬?”

“이거? 원추리라 카능기다. 쫌 있으면 밑에 마늘 같이 생긴 열매가 열린다 아이가. 이거 잎만 떼 무도 맛있데이.”

일단 산에 오르자, 아침에 가기 싫어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는 나의 질문을 받아내느라 할머니는 바쁘시다. 할머니와 함께 산을 다닌 지 벌써 2년이 넘어가는 것 같은데, 아직도 나물들이 헷갈리고 나무의 이름이 궁금하다.

“현이야, 여기서 잠깐 쉬어가자. 아이구, 할매도 인제 나이를 먹었는지 대 죽겠다.”

“그라자, 할머니.”

할머니는 힘에 부치셨는지 손수건을 깔고 바닥에 앉으셨다. 이마에 촉촉하게 배인 땀을 훔치시며 할머니는 나에게 말씀하신다.

"현이야. 니가 커서 애를 낳으문, 놀이터보담두 산에 더 자주 델꼬와야 하능기다. 자고로 애들은 자연 속에서 커야 하능기다. 얼매나 좋노? 산에서 이렇게 자식이랑 부모랑 따악, 마주 보고 있으면, 솔솔 바람도 불어오제, 이렇게 커다란 나무도 많고 맛있는 나무들도 많제. 그만한 교육이 없는기라. 아한테 100만원을 줘바라, 이렇게 산에 데리고 오는 것만치 기억에 남을지.“

할머니는 틈만 나면 나에게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길러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산에 데리고 오는 것을 최고로 치신다. 하지만 그런 말씀을 하실 때마다 괜히 할머니가 죽기 전 나에게 신신당부 하는 유언을 듣는 것만 같아 할머니께 짜증을 부린다.

“아, 됐다, 마. 난 결혼 안하고 할매랑 살끼다.”

“허이구, 내 살아보닝께 결혼 안한다고 우기는 것들이 젤 먼저 가두만.”

“나는 안그럴끼다!”

왠지 모르게 서글픈 마음이 들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눈에 고인 눈물을 감추기 위해 괜시리 두리번거렸다. 할머니는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뒤에서 중얼거리신다.

“내가 나고 자라고 지금까지도 밟고 있는 여기가 할매는 참말루 좋더라. 늙지두 않제, 변하지두 않제, 돈 빌려달라고 하지도 않제. 최고의 친구인기라….”

“….”

“현아, 이만 내려가자. 할매 배고프다.”

“그라자.”

그 날, 할머니와 함께 산을 내려오면서 나는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날따라 처음 보는 나물들이 지천에 널려있었는데도 나는 입술조차 뗄 수 없었다. 할머니가 말씀하신 늙지 않는 친구, 변하지 않는 친구…. 할머니껜 그 친구가 산일지 몰라도, 나에게 아직은 그 친구가 당신이란 것을 할머니는 아실까.

집에 도착하자 할머니는 배낭에 담아놓으신 산나물을 무쳐 맛있는 점심상을 차려오셨다. 나는 이것들 다 내가 발견한 거라고, 호들갑을 떨며 일일이 가족들 숟가락 위에 올려주었다. 아빠 엄마도 웃는 얼굴로 잘했다며 맛있게 드셨다. 슬쩍 할머니를 쳐다보니, 할머니는 엄지손가락을 나에게 추켜올려 주셨다. 나도 덩달아 할머니께 웃음을 지어 보였다. 문득, 바쁜 일상이 0시부터 24시까지 자신을 따라 다니는 요즘의 도시 사람들은 이런 여유를 알까 궁금해졌다.

대입의 고삐를 쥔 요즘까지도 나는 할머니와 함께 운동화 끈을 조이며 산에 오를 채비를 한다. 일주일에 한 번 뿐인 데이트, 언제까지 지속될 진 모르지만 할머니와 함께 할 수 있는 그 순간까지 나는 산에 오를 것이다. 그래서 하늘의 푸르름, 냇물의 맑음, 나무들의 웅장함, 나뭇잎들의 소란스러움까지 두 눈동자에 가득 담아 할머니를 바라볼 것이다. 나는 할머니에게 있어서 산의 희망참을 전하는 매개체이고 싶다. 눈이 침침해서 미처 찾아내지 못한, 산에 사는 친구들과 나누지 못하는 그 자그마한 것들까지도 우리 할머니께 고스란히 전해드리는 힘찬 우체부이고 싶다.

이번주 일요일의 비밀데이트에는 엄마 아빠랑 언니도 끼워줘야지. 그리고 할머니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할머니 방의 문을 열고 이렇게 속삭여야지.

“할머니. 일어나. 주말 데이트, 안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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