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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선 청계산의 겨울나무
  • 입상자명 : 나 옥 실
  • 입상회차 : 6회
  • 소속 : 일반부
  • 장르 : 일반부 시·수필

햇볕이 잘 드는 누런 풀밭에 누웠다.

생각과는 달리 겨울 풀밭은 보드라왔다.

갑자기 넓어진 시야에 눈이 부시다. 스스르 눈이 감긴다.

맨얼굴에 와 닿는 바람이 싸늘하다 못해 살을 저미는 듯 아파서 얼굴을 돌리고 모자를 비스듬히 기울여 바람을 막았다.

허리 뒤쪽이 시려서 마치 얼음을 대고 있는 것 같았다.

숨을 들이쉬면 냉기가 목을 타고 내려가면서 속이 들들들들 떨리다가 후우 내뱉으면 도로 나가서 편안해졌다.

그렇게 호흡하며 몸속을 바라보다 가만히 눈을 뜨니, 하늘은 더욱 파랗고, 가느다란 나뭇가지들이 열 손가락을 쫘악 펼치고 있다. 순간 나를 둘러싸고 있는 나무와 가지들이 커다란 사원의 둥근 지붕처럼 느껴진다.

눈을 감았다.

무늬가 아름다운 투명한 유리 돔 안 한가운데 내가 반듯이 누워 있다. 유리를 통과한 따뜻한 햇볕이 몸을 부드럽게 감싼다. 아, 아늑하다.

추위도 몸의 무게감도 모두 사라지고 나는 그대로 녹아내려 땅이 되었다.

다시 눈을 떴다.

나무들이 빙 둘러서서 온 몸을 기울여 땅이 된 나를 감싸고 있다.

땅이 너희를 기르는 줄만 알았더니, 이제 너희가 자라 어머니 땅을 보호하는구나!

이 땅은 온전히 너희들 것이다.

다시 춥다.

정아, 측아, 꽃눈, 잎눈을 차례로 떠올린다.

두툼한 외투로 몸을 감싸듯, 여러 겹의 비늘과 털로 무장하고 한겨울의 추위를 견디는 겨울눈들.

그리고 나무껍질 속에 숨어서 겨울이 가기를 기다리는 눈들.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추위도 아랑곳없이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

따뜻한 집안에 숨어 어떻게든 아프지만 않고 긴 겨울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노약자들.

숲에서 보이는 겨울눈들의 모습은 어쩜 사람들 사는 모습과 그다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건 그렇고, 어쩌자고 나는 이 추운 겨울날 덜 덜 떨면서 여기에 누워 있는 것일까?

포근한 집안이 그립다. 집에 있고 싶다. 그런데도 왜 여기 나와 있는 것일까?

나는 아마도 은아나 잠아보다 정아나 측아이기를 바라는 게 아닐까?

겨울을 견디어낸 강도만큼 크고 아름다운 잎과 꽃을 피우고 싶어서…?!

양지바른 곳에 모여 잠시 얘기를 나누다가 더 추워지기 전에 서둘러 배낭을 꾸리고 움직였다.

산등성이를 넘기 전, 줄기가 손목만한 작은키나무 앞에 멈춰 섰다.

사람 키를 넘을까말까하다.

잔가지는 위에서 우산처럼 펼쳐진게 아프리카초원에 윗가지만 남아 있던 나무와 닮았다.

기린이 잎을 다 따먹어서 기린의 입이 닿지 않는 높은 가지만 남았다는 그 나무 말이다.

이름은 노린재나무라 했다. 산의 8부, 9부 능선에 많이 나타나는 나무라 한다.

그런데, 이름이 특이하다. 노린재… 그런 이름을 가진 곤충이 있는데…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그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용기를 내서 물어보았다.

나무에서 냄새가 나나요?

이름이 왜 노린재인가요?

선생님이 설명하시길,

이 나무를 태워 재를 물에 풀어서 염색하면 노란 색깔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노린재라고.

그럼 노란재지 왜 노린재람?

심통이 난다. 그렇게 이름붙인 사람을 한 대 쥐어박고 싶다.

내겐 노린재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어 지금도 ‘노린재’하면 바짝 긴장한다.

중학생 때였던가?

한여름 더위에 지쳐서 방문을 열고 누워 쉬고 있는데, 뭐가 획 날아와서 눈두덩 위에 붙었다.

놀라서 손으로 탁 밀쳤는데, 따끔한 자극과 함께 노린재가 떨어졌다.

순간, 심한 통증으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아팠던지 몸이 발딱 일어나면서 소리를 지르고 발광했던 기억이 난다.

손은 역한 냄새로 가득하고, 한 손으로 왼쪽 눈을 감싼 채 수돗가로 달려가 물로 계속 씻었다.

그런 뒤로 노린재만 보면, 아니 노린재 냄새만 풍겨도 바짝 긴장해서 주위를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그래서일까? 노린재나무를 설명할 때도 나무 가까이 가지지 않고 멀찌감치 서서 들었던 그 까닭이…

내려오는 길은 포근하다.

등성이를 넘어 산을 반쯤 내려왔을까, 낙엽이 수북히 쌓여 발이 푹 푹 빠지는 골짜기를 지나 개살구나무를 만나러 갔다.

주위를 제압하는 당당한 풍채에 줄기는 한아름이 넘고 거칠고 두꺼운 껍질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다. 수피를 눌러보니 코르크처럼 폭신폭신하다. 쑥스러움을 떨치고 두 팔을 벌려 안아 보았다. 따뜻하다.

눈을 감고 한참 그러고 있었더니, 얼어서 웅크렸던 몸과 마음이 어느새 부드럽게 풀린다.

갑자기 주위가 조용하다.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떠 보니 사람들이 다 가고 없다.

아쉬운 맘을 접고, 봄에 꽃이 피면 와서 보리라 맘을 먹으며 휘청 휘청 뛰어서 사람들 뒤에 붙었다.

등산로에 들어서자, 늘씬하게 자란 큰 나무 옆에서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약간 비탈진 곳인데 수피가 미끈하고 줄기가 둘이다.

줄기 하나는 곧장 위로 자랐고, 다른 하나는 옆으로 누워 자라다가 다시 위로 곧장 자라서 두 줄기가 형제처럼 나란하다.

왜 이렇게 특이한 수형이 되었을까?

아무도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한다.

선생님 가라사대, 정아가 자라다가 쓰러지는 바람에 측아가 정아의 자리를 차지하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원래의 정아가 기운을 내서 위로 위로 자라나 두 줄기가 경쟁하여 이렇게 크고 멋진 수관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하신다.

눈이 줄기를 따라 올라가 끝가지에 머문다. 하늘을 차지한 끝가지는 넓게 퍼져서 보기 좋은 그물무늬를 만들고 있다.

이건 무슨 나무지? 얘, 너는 이름이 뭐니?

선생님은 단박에 아시는 것 같은데 함부로 가르쳐주지 않으시고, 부지런히 나무 아래를 뒤져서 나뭇잎을 찾고, 루페로 겨울눈을 들여다 보신다. 모두들 머뭇거리자, 이것은 피나무라고 일러 주시면서 열매를 찾아보라고 하셨다.

개살구나무가 가슴에 남아서 그러나 아님 지쳐서 바로 내려가고 싶어 그러나 몸을 움직이기가 싫다.

나뭇잎을 발로 설렁설렁 뒤집었다. 공부하는 태도가 영 아니네.

죄송한 마음에 허리를 구부리고 손으로 차근차근 걷어냈지만 열매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한참 후에 테니스공처럼 털이 복실한 콩알만한 열매 하나를 주워 올렸다.

여기있어요!

모두들 와아 하는 탄성과 함께 얼굴이 환해졌다. 아, 발견의 기쁨!

하나가 나오니, 여기서도 저기서도 줄줄이 이어져 나오고, 한 녀석은 벌써 부엽토가 수북히 쌓여 푹신한 비탈에 하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피나무는 옛 어른들이 껍질을 벗겨서 줄을 꼬아 썼던 데서 그 이름을 얻었다 한다.

나란히 위로 쭉 뻗은 두 줄기를 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숲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나무들도 경쟁을 하는구나!

죽기 살기로 아득바득 경쟁을 했어도 그것은 아마도 선의의 경쟁이었으리라.

한 밑둥에서 나와 곧장 위로 자란 한 줄기와 옆으로 누웠다가 휘어져 다시 위로 자란 또 한 줄기가 굵기고 길이도 비슷했으므로, 숲 꼭대기에 이르러 비로소 사이좋게 잔가지를 내고 평화로와진 나무들, 사람들도 이렇게 살면 참 좋겠다!

나무들이 이 추운 겨울을 견디어내는 데도 어떤 의지가 숨어 있는 게 아닐까?

아마도 날씨가 따뜻해지면 아름다운 잎과 꽃을 피워내리라는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는 건 아닐까?

왜냐하면,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는 불변의 진리를 나무는 진작에 알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찰피나무를 끝으로 곧장 마을로 내려왔다.

첫 산행이라 서먹하고 서투르고 춥고 바빴지만 해냈다는 자족감으로 기쁨이 솟는다.

할 수 있구나! 희망이 보이는구나!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보태졌다.

온 산을 환하게 밝힐 개살구꽃을 보러 봄이 되면 다시 오리라는 희망을 품고 비탈을 내려오는 동안.

어느덧 추위는 가시고 손끝까지 온 몸이 훈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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