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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광릉 숲의 비밀
  • 입상자명 : 정 정 자
  • 입상회차 : 6회
  • 소속 : 일반부
  • 장르 : 일반부 시·수필

그 숲엔 어떤 신비가 숨어 있기에 늘 나를 설렘과 조바심으로 달려가게 하는 걸까? 서울 우리 집에서 대중교통으로 두 시간 남짓 걸리는 광릉수목원은 복수초가 눈밭을 뚫고 나올 때부터 국화동산에 무서리가 내릴 때까지 무수한 꽃들의 행렬이 릴레이를 펼치며 삶에 지친 심신을 씻어주는 녹색 전당이다.

하늘을 찌르는 전나무들이 근위병처럼 늘어선 입구에 내리면 바늘 쌈지를 뿌리는 듯한 피톤치드와 서늘한 음이온의 세례가 가슴 속까지 스며들어 온몸의 세포들을 또록또록 눈뜨게 한다.

올해는 유난히도 긴 장마와 폭우로 전국 각지에서 엄청난 수해를 당했다. TV 화면엔 온통 붉은 수마가 혀를 널름거리고 한강은 흙탕물이 위험수위를 범람하는데, 희한하게도 광릉 숲에 굽이치는 냇물은 술독에서 방금 떠낸 청주 빛처럼 아니, 큰 물통에 우유 한 방울을 떨어뜨린듯 하여 늘 그 비밀이 궁금했다.

하지만 아침 산책을 나온 왜가리와 늠름한 메타세쿼이어 안내를 받으며 다리를 건너면 곧바로 그 해답의 실마리가 반쯤은 풀리게 된다.

정문이나 후문 쪽 습지원과 수생식물원엔 무성한 부들이며, 창포, 줄, 수련, 마름들이 장마로 흐려진 물을 정화하느라 분주하다. 그 화려하던 꽃들이 사라진 청청한 숲엔 장마에 깨어난 천마와 상사화들이 목을 쑥쑥 내밀고 거북꼬리며 고마리, 멸가치들이 빗물을 거르고 있다. 가녀린 파리풀꽃도 감사하다는 듯 꿀을 빠는 모시나비를 따라 숲 생태 관찰로에 접어들면 나머지 못풀었던 의문을 마저 풀 수 있게 된다.

행여 개미 한 마리라도 다칠세라 굽이굽이 나무판자를 깔아놓은 산책로 주변엔 산뜻한 유니폼을 입은 대자연의 오케스트라 관현악단원들이 질서 있게 정렬을 하고 빗방울 행진곡을 연주하고 있다.

단풍나무들은 프로펠러 씨앗을 돌려 매미 날개를 연주하고, 사랑의 하트로 온몸을 단장한 계수나무들은 향수어린 세레나데를 부르는데, 늠름한 보디빌더 서어나무가 딱따구리 장단으로 지휘봉을 젓고 있다.

침엽수들이 현악기로 아침햇살을 켜 내리면 중간 키 쪽동백, 물푸레나무, 느름나무, 산사나무들은 일제히 햇살건반을 두드리고, 키 작은 국수나무, 고추나무, 싸리나무들은 신나게 드럼을 치며 피리를 분다. 그 밑에 늘어선 물봉선, 천남성, 동자꽃들도 햇살에 반짝이는 트라이앵글이며 찰찰이를 치는데 난쟁이 빈대풀, 주름풀, 조개풀들도 어른거리는 햇살비늘을 잡듯 짝짝이를 치고 있다.

그래 바로 저거였구나. 아무리 울창한 숲이라도 키 큰 수종만 빽빽이 들어차면 키 작은 나무들이며 풀들이 햇빛을 못 받아 죽게 되고, 흙이 드러나며 장마가 질 때 토사가 흘러내린다는 걸 왜 미처 몰랐을까?

광릉 숲은 온갖 수종과 풀이 골고루 자생하도록 간벌을 잘해주어서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층층이 걸러주는 정수기가 되어 물이 늘 깨끗할 수밖에 없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웅장하고 큰소리를 내는 악기들 속에 보잘 것 없는 캐스터네츠도 제몫을 다해야 장엄하고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는 오케스트라악단과도 같다.

숲 생태 관찰로를 벗어나면 소리봉 그림자가 잉어 떼를 키우는 육림호에 다다른다. 육림호 뒤쪽엔 개다래넝쿨 우거진 바위틈에 옛 고향 할머니가 쓰던 표주박을 닮은 옹달샘이 서늘한 눈빛으로 맞아준다.

육림호가 꽁꽁 언 겨울에도 돌돌거리며 입김을 뿜는 이 옹달샘은 광릉수목원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고 즐겨 찾는 장소이다. 내 어린 시절 고향마을 뒷산에도 이런 옹달샘이 있어서 사철 마르지 않는 그 샘을 동네 사람들은 무지개 샘이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어느 날 전깃불도 안 들어가던 그 산골에 버스가 들어가고, 가재를 잡고 보리수를 따던 무지개 샘 골짜기엔 골프장이 들어섰다. 그 후 고향마을은 독한 농약에 오염되어 샘물도 못 마시게 되었고 옹달샘은 먼 나라로 이민 간 그리운 친구처럼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광릉 숲에서 이 옹달샘을 처음 만났을 때 난 마치 잃었던 고향을 되찾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갈 때마다 모래가 가라앉은 샘을 청소하고 주변에 떨어진 낙엽을 걷어냈다. 어느 날은 그 옹달샘에 개구리가 들어앉아 눈을 부릅뜨고 주인행세를 하고, 또 어느 날은 지렁이가 꿈틀거리며 ‘이 물은 살아 있다’고 온 몸으로 일러주곤 했다.

아, 그런데 광릉에만 산다는 천연기념물 크낙새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한때 산림욕장으로 개방을 하던 시절,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올 때 놀라 달아났다는 크낙새는 안타깝게도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 흔한 칡넝쿨은 왜 보이지 않나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칡넝쿨은 다른 나무들을 휘감아 말라죽게 하므로 철저히 뽑아버린단다. 그걸 보면 우리 인간도 너무 독선적이고 욕심이 많으면 공동생활에서 외면당하고 배척당한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육림호 밑에는 우리 선조들의 구황식물이었다는 도토리나무 휴게광장이 있다. 날이 가물면 도토리는 햇살을 많이 받아 수정이 잘되므로 흉년엔 도토리가 많이 열린단다. 내가 어릴 때 어머니는 도토리묵을 만들고 남은 찌꺼기도 아깝다고 뜰뜨름한 도토리무거리 떡을 쪄주셨다.

광릉 숲엔 또 천연기념물인 미선나무, 광릉요강꽃, 광릉물푸레, 광릉골무꽃이 있고, 서어나무에만 사는 장수하늘소와 백악기에 살았던 울레미소나무 어린 묘목이 새 뿌리를 내리느라 몸살을 앓고 있다.

백두산 호랑이나 반달곰처럼 보호를 받는 귀족들도 있지만, 일광욕을 나왔다가 미움을 받는 뱀들이며, 멧돼지와 고라니, 다람쥐와 새들, 수많은 곤충들과 미생물들까지 질서를 유지하며 풍요롭게 살아간다.

숲은 이 모든 가족들을 보호하는 아름다운 울타리이고 보물창고이며 특히 우리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생명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4억 년의 역사를 지닌 수목들 앞에서 고작 200만 년밖에 안된 우리 인간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또한 잘 가꾸어진 광릉 숲은 넉넉한 인품을 갖춘 성자처럼 늘 풍요로운 신비로 우리를 감싸주고 포용하며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게 하는 삶의 교육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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