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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숲의 노래
  • 입상자명 : 임 종 훈
  • 입상회차 : 6회
  • 소속 : 일반부
  • 장르 : 청소년부 글쓰기

얼마 전 모 잡지를 정기구독하면서 사은품으로 귀한 사진집을 한 권 증정받았다. ‘사진으로 보는 옛 한국’이라는 제목의 ‘은자의 나라(Korea, The Hermit Nation)’라는 부제(副題)가 붙은 사진집으로 외국기자들이 촬영한 구한말에서 근대화 초기까지의 우리 나라 문화와 풍경을 사진으로 기록한 것이었다. 거기에 나오는 기록에 따르면 한국의 산들은 대부분이 민둥산들(denuded mountains)이라 폭우가 쏟아지면 황톳물이 급류를 이루어 아래로 쏟아져 내려 마을이 온통 진흙탕이 되고 약한 다리를 휩쓸어버려 마을을 고립시키기도 한다는 목격담이 소개되어 있으며 실제 사진으로 봐도 나무 한그루 변변하게 보이지 않는 불모(不毛)의 황야 그대로였다.

그 사진을 보면서 내 초등학교 시절인 60년대 말의 산의 모습이 떠올랐는데 당시에도 산은 지금처럼 무성하게 숲을 이루고 있는 곳이 아니라 곳곳에 나무가 듬성듬성 심어져 있었다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정도로 볼품없는 산들이었다. 그 시절 초등학교 음악시간에 자주 불렀던 ‘산에 산에 산에다 나무를 심자. 메아리가 살게시리 나무를 심자’라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노래와 전교생이 식목일을 전후하여 산에 가서 나무를 심었던 일, 그리고 징그럽기만 했던 송충이를 잡으러 인근 산에 갔던 일 등등이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그랬던 산이 지금처럼 울창하게 우거진 것이 정확히 언제부터 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사라진 숲을 복원하는 것이야말로 산을 산답게 하는 일이며 아울러 숲이 인간에게 베푸는 다양한 혜택을 온전하게 누릴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정부와 국민 모두가 절실하게 인식하고부터 일 것이다. 다시 말해 숲을 잃어버리고 난 후 숲의 가치와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되었을 것이며 숲을 이루지 못하는 산은 한낱 커다란 흙무더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면서 심고 가꾸고 보호한 결과가 지금처럼 울창한 숲을 이룬 산으로 되살아나게 되었을 것이다.

숲은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은 숲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단순한 구호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공존(共存)의 이유가 되어야 하는 것은 숲이 인간의 삶에 끼치는 영향이 참으로 지대하다는 것과 그 숲이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까지 계속 숲으로 존재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을 아끼고 보전하려는 사람들의 적극적이고도 실천적인 의지와 노력이 무엇보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숲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어머니의 품속에 안긴 듯 아늑해지고 마음이 그 밑바닥부터 고요해지는 것은 한낱 이미지이거나 상상의 작용이 아니다. 까마득한 날부터 숲은 어머니의 품처럼 모든 것을 포용하여 달래고 어루만지는 정화(淨化)와 진정(鎭靜)의 성소(聖所)였다. 어디 생각만 그러한가. 등산이든 산책이든 실제로 숲에 들어 길을 걷다보면 난마(亂麻)처럼 얽히고 설킨 세상사가 어느 순간 단순해지고 숲처럼 깊은 숨 한 번 길게 내쉬면 애면글면하다 타버린 가슴 속 찌꺼기들이 모조리 빠져나가고 대신 청량하기 그지없는 숲의 푸른 기운이 온 몸 가득 들어차 마치 새 목숨을 얻은 것처럼 신선(新鮮)해 지기도 한다.

고맙게도 잘 자란 나무들이 울울창창한 것을 숲의 육신이라고 한다면 보이지는 않지만 뭇생명들을 키우고 또한, 영위케 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음덕(陰德)들은 숲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설적이기는 하나 숲의 그 고마운 음덕들은 그것이 사라졌을 때 겪어야 할 수많은 고통들을 생각해보면 보다 자명해진다. 생명 유지의 근원인 산소의 생산이 중단되어 호흡 자체가 어려워질 것이며 숲이 그 모태(母胎)로서 키우거나 보호하고 있던 수많은 야생(野生) 또한 사라져 세상은 다양성을 상실한 삭막한 공간이 되고 말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소위 녹색댐이라고 부르는 숲이 없어 집중호우를 갈무리하지 못한다면 해마다 그로 인해 겪어야 할 물질적, 정신적 피해는 돈으로 환산하기조차 어려울 것이며 수많은 사상가와 예술가들이 숲을 거닐며 사색하고 그로부터 영감(靈感)을 얻어 탄생시킨 불후의 사상들과 예술 작품들도 단절되어 문화적 빈곤(貧困)을 초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상에서 열거한 것들도 숲의 전부가 아닌 일부만을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산불로 숲이 불타거나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로 산림이 황폐화되는 것을 볼 때마다 안타깝기 그지없는 마음이 드는 것은 인간과 숲이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아주 오래 전부터 생명을 전제로 긴밀하게 연결된 공존(共存)의 관계이기 때문에 숲이 파괴되고 황폐화된다면 그만큼 인간의 생존자체도 위협받을 수밖에 없으리라는 우려 때문이다.

근래 들어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자국(自國)의 국부(國富)를 산정함에 있어 산림(山林)의 가치를 녹색 GNP(Green GNP)의 개념으로 그에 포함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숲의 환경적 가치를 당장은 화폐가치로 환산하기 곤란하지만 숲의 가치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여 그 보존에 있어 이전과는 다른 보다 합리적이고 실천적인 행동들이 뒤따를 수 있기 때문에 바람직한 시도라고 여겨지며 빠른 시간내에 그것이 실현된다면 세계 각국이 건강한 숲을 조성하는데 아낌없는 노력과 투자를 하게 되어 그만큼 삶의 질도 한층 향상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찬 기대를 갖게 된다.

숲은 늘 그곳에 있다. 단단하게 땅을 움켜쥔 나무들이 때로는 푸른 바다로 일렁이고 때로는, 욕심을 모두 떨쳐낸 겸허한 수행자의 모습으로 그 안에 드는 모든 것의 건강한 야생을 지지한다. 그리하여 숲은, 인공에 지쳐 권태롭고 피곤하기만 한 심신을 변함없는 그대로의 모습과 마음으로 달래고 어루만져 부활(復活)을 꿈꿀 수 있게 한다. 숲에 들어 가만히 귀 기울여 보라. 미풍에조차 흔들리는 낱낱의 잎들이 만드는 것은 한낱 소리가 아니다. 까마득한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그리고 훗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가야 할 침묵(沈默)의 노래이다. 그 노래로 사람들의 마음마다에 푸른 숲 울울하게 우거져 깊어진다면 삶 또한 얼마나 그윽해질 수 있을 것인가? 세간(世間)의 그 어떤 사상이나 이념들도 숲에서는 가볍기 그지없는 한낱 수다에 지나지 않는다. 숲은 처음부터 오직 하나의 생각, 깊고 푸른 자연주의(自然主義)만으로 수없이 많은 목숨들을 키우고 가르쳐온 위대한 어머니이자 스승이다.

아무도 숲이 있는 곳을 말해주지 않지만 숲은 늘,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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