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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선 마을 뒷산과 도시자연공원
  • 입상자명 : 임 채 수
  • 입상회차 : 7회
  • 소속 : 일반부
  • 장르 : 일반부 시·수필

일자산은 서울의 동쪽 끝 둔촌동과 경기도 하남시의 경계면에 위치한 남북으로 약 4km 길게 뻗은 야트막한 구릉들로, 가장 높은 봉우리래야 해발 129m에 불과한 우리나라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마을 뒷산으로, 특별히 경관이 빼어나다거나 유서 깊은 역사적 유적들을 많이 품고 있는 명산으로 꼽힐 만한 산은 아니나, 도심에서 벗어나 쉽게 깊은 산 속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울창한 숲과 계곡, 곳곳에 맑은 물이 솟는 옹달샘이 있는 등 산림욕을 겸해 가벼운 운동과 산책에 알맞은 산으로, 인근 주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삭막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쉼터 구실을 하고 있는 산이다.
아까시나무를 비롯한 아름드리 큰키나무들이 그늘 집을 짓고, 관목대열의 찔레나무 등이 군데군데 작은 군락을 이루며, 숲 바닥에는 앉은뱅이 풀들이 숲 깊이까지 들어온 여러 종(種)의 외래식물과 함께 촘촘히 자라고, 딱따구리 등 10여 종 이상의 텃새, 철새들도 천적(사람)들의 눈을 피해 둥지를 감춘 채 살아가고 있다. 거주지의 가까운 마을 뒷산에 철마다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지고, 소박한 들꽃을 비롯해 온갖 생명들이 반겨주니 고맙기 그지없다.
숲 속 생명체들의 모습과 이들이 내는 소리는 계절에 따라 다르다. 잎눈과 꽃눈을 깨우는 순한 봄바람 소리, 한여름 빗줄기가 넓은 잎을 때리며 내는 “후두둑 후두둑”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화음, 산들바람과 함께 들리는 풀벌레들의 합창소리, 겨울이면 회색빛 숲의 표정이 보이는 바람소리 등 고저장단이 다른 독특한 소리들로 일자산은 사철 건강한 숲으로 충만한 모습이다.
또 일자산은 우리네 삶의 애환과, 생태계 변화의 징후들이 느껴지기도 하는 산이다.
봄이 되어 단단하게 언 대지를 뚫고 얼굴을 내미는 들풀들의 연둣빛 여린 새싹이나, 모진 추위를 나목으로 버텨낸 가지에 돋는 새 움은 엄숙한 자연경외의 시작이다. 새싹에게 겨우내 맹아가 웃자라거나, 얼어 죽지 않도록 수분을 조절해 준 것은 누구이며, 겹겹 맹아의 껍질들이 벗겨질 때마다 내리는 봄비는 어떤 섭리에 의한 것일까?
일자산의 잎눈보다 꽃눈이 먼저 나오는 산수유·개나리·진달래·목련은 해마다 순서가 정해진 듯 차례로 피어왔으나, 근래에는 순서가 무너진 듯하다. 찔레나무의 경우 계속되는 춥지 않은 겨울로 인해 겨우내 맹아조절이 어려운지 파란 잎을 피웠다 지기를 반복한다.
계절과 계절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것일까? 최근의 기상에 관한 기억들로 1994년 극심했던 가뭄과 함께 체온을 넘나들던 높은 기온에, 마치 ‘이승의 지옥 체험’같은 느낌이 들던 열대야. 2005년 2월 18일 낮 기온이 20°C에, 4월 하순경부터 여름 날씨의 징후를 보였던 ‘잊힌 봄’, 그리고 지난해의 ‘사라진 가을’이 꼽힌다. 지난해는 늦여름 기온(16~20°C)이 입동 무렵까지 이어진 탓인지, 아카시아는 12월 초에도 한여름 못지않게 ‘푸르렀고’ 활엽수들은 단풍 옷으로 갈아입기를 완강히 거부하는 양, 그 곱던 본래의 단풍 색을 띄지 못하고 말라가는 경우가 많았다. ‘계절의 반란’이 일상에 가까워진 느낌이 드는 예사롭지 않은 징조들이 두렵기까지 하다.
아까시나무와 참나무는 천연잡목림 일자산 숲의 우점종이다, 매년 5월 초, 아까시 꽃이 한창 흐드러지게 필 무렵이면 필자의 아파트 창에까지 꽃향기가 바람에 실려와, 꽃그늘을 찾게 한다. 꽃이 질 무렵의 바람에 날리는 아까시 꽃비도 마음을 설레게 한다. 10여 년 전만해도 꽃철에 맞춰 양봉하는 이들이 수십 개의 벌통을 놓았으나, 요즈음은 놓는 이들이 없다.
따라서 벌들이 “잉잉” 날갯짓 소리를 내며 꿀을 모으는 정취는 보고 느낄 수 없게 되었다.가끔 꽃등에, 흰나비 몇 마리가 꽃 사이를 나는 쓸쓸한 꽃 잔치가 된 것이다.
지난 해 6월 중순경, 아까시나무에 이상 현상이 보였다. 일자산뿐만 아니라 전국의 산야 아까시 숲에 나타난 현상으로, 짙은 녹색으로 자라야 할 아까시 잎이 노랗게 단풍지는 황화(黃化)현상이 번진 것이다. 산림전문가들은 ‘병충해가 아닌 생육저하현상’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검증이 안된 전문가의 추측으로 들려, 혹시 ‘소나무 재선충’에 이은 아까시나무 역병(疫病)이 아닌가 하는 조바심이 들기도 한다. 일자산 아까시나무는 근래 잦아진 태풍 때 쓰러진 나무가 여럿이고, 노쇠현상이 뚜렷한 나무가 늘어나는 등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우점종의 선두자리를 신갈나무 등 참나무에 넘겨줄 것으로 예측되기도 한다.
일자산의 큰 참나무의 밑동으로부터 1.5~2m 높이에는 예외가 없이 수피(樹皮)가 짓이겨지고 부푼 채 굳어진 상처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예전에 도토리 줍기에 나선 사람들이 떡메나 큰 돌로 참나무의 둥치를 내리친 흔적이다.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기 위한 수단으로 더 많은 도토리를 수확하기 위해 참나무를 때리고 또 때렸던 것이다. 얼마 전만 해도 참나무 밑 도토리를 줍는 일은 숲에서의 보물 찾기였으나, 요즘은 찾는 이들이 없다. 여물어 떨어지는 도토리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는 7월 말경부터 ‘도토리거우벌레’가 풋도토리 열매가 달린 가지 새순의 5cm 근처를 모조리 예리한 칼로 자른 듯 끊어 땅에 떨어뜨리는 것이다. 돌덩이 등으로 몸의 일부가 짓이겨지도록 맞으면서도 거르지 않고 열매를 맺어 결실에 이르던 참나무들도 이 벌레의 심술에는 속수무책인 듯, 결실률은 해마다 떨어지고 있으며, 산밤나무도 가시밤송이 모습만 보여줄 뿐, 밤알이 여물지 못하는 쭉정이다. 사라진 도토리와 함께 최근에는 참나무들이 성장 철에 말라죽는 ‘시들음병’이 이 산에도 번져, 이래저래 참나무의 수난이 우려된다.
겨울을 앞둔 다람쥐는 여기저기에 굴을 파고 도토리를 물어다 양식으로 묻어두는데, 이 중 새봄이 되어 다람쥐가 찾아내지 못한 땅 속의 도토리가 싹을 틔우고 큰 나무로 자라 숲을 이룬 것이라 한다. 결국 참나무는 다람쥐에게 겨울양식을 제공하고, 다람쥐는 참나무의 후손을 퍼뜨리는 데 도움을 준 공생적 관계인데, 참나무들은 다람쥐가 겨울 대비로 도토리를 땅 속에 저장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인가?
숲에는 신비한 생명의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가을이 깊어지면 나뭇잎은 스스로 떨어진다. 꼭 필요한 것만 가지고 살다가 훌훌 털고, 거름이 되기 위해 자신을 낳아준 땅으로 돌아가는 숲 속 생명들에서 가을이면 절제된 생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다. 자신이 떠나지 않으면 봄~가을 동안 자신을 키워주고 붙잡아주던 나무의 몸통이 엄동설한에 얼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뭇잎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가야 할 때를 알고 떠나는 나뭇잎의 뒷모습이 아름다우면서도 처연하다.
식물이 잎과 꽃을 피우고 향(香)을 내는 것은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후손을 번식시키기 위한 수분(受粉)을 해줄 벌, 나비 등 곤충이나 새를 부르기 위함이고, 눈속임이나 공짜로 손님을 유혹하지 않으며, 수분의 대가로 일용할 양식인 꿀과 꽃가루를 준다. 또 씨앗을 먼 곳에 퍼뜨리는 역할을 하는 운반역 동물에게는 씨앗에 영양가 있는 맛있는 살도 붙여준다.
숲 속을 걷는 일은 고요를 연습하는 일이며, 관찰과 몽상, 예기치 못한 만남, 놀라움 등을 경험하는 기회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숲은 거친 야성과 자연의 순결함과 원기가 충만한 곳이며, 두 발로 걸어야 다가갈 수 있는 곳, 그래서 때때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땀 속에서 자연과 교감을 이루면서, 생태적 상상력을 즐기는 곳이다. 연중 숲 걷기에서 가장 상쾌한 기분이 드는 때는 입동 무렵, 좀 싸늘한 기온에, 가을 가뭄 끝에 비를 뿌려준 날로, 진한 흙냄새가 느껴지는 날이다. 새벽 어둠이 걷히기 전, 숲길을 따라 찬 이슬을 맞은 서양등골나물이 흰 꽃을 피우고 도열하듯 서, 안내하는 착각이 들게 하는 이슬 길도 좋다.
12월의 일자산은 연중 가장 밀도가 느슨한 계절이다. 숲의 바닥에는 푸근한 낙엽 양탄자가 깔리고, 짧은 가을 햇볕을 받으며 잠시 꽃을 피웠던 ‘겨우살이’도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새들도 산수유·팥배나무 가지에 딸린 빨강, 깜장 열매를 외면한 채, 다른 곳을 찾아갔는지 날갯짓과 소리도 뜸해져 적막감은 더해간다. 높아진 그린(green)욕구와 건강을 위한 숲 걷기, 수돗물을 불신하는 ‘물통부대’인파로 사철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붐비는 일자산 거처에 불안을 느껴 떠나는 것일까? 까치밥 남기던 인정조차 메말라가는 세상, 궁지에 몰리고 있는 새들의 선택이 궁금하다.
일자산에 눈이 쌓이면 풍경은 더욱 단순해진다. 흰 눈이 덮인 사면(斜面)의 나무들은 흰 종이 위에 회갈색 점과 선으로 그린 한 폭의 수묵화다. 겨울 숲의 진수는 군더더기가 없는 간결함이다. 잎을 떨어뜨리고 곧추선 줄기의 단정함, 칼바람에 맞서는 의연함, 자연의 질서에 순응함은 우리를 성찰하게 하며, 자주 흐트러지는 정신을 가다듬게 한다.
매정한 인고의 세월 너머 봄의 ‘새싹’을 노래한 한승오 시인의 시를 읊조리며 오늘도 일자산 산행을 위해 신발 끈을 조여 맨다.
“차갑고 시커먼 땅 속, 작고 여린 씨앗이 홀로 몸을 웅크리고 있다./…(중략)/ 죽은 듯한 침묵, 흔들림 하나 없는 고요 속에서 / 씨앗은 아무도 모르게 불을 지핀다/…(중략)/ 아, 새싹은 스스로 불사르는 한없는 뜨거움이구나.”
30여 년을 오르내리던 마을 뒷산 일자산이 머지않아 ‘도시자연공원’으로 변모하리라 한다. 소박한 마을 뒷산 여기저기에 인공 건조물들이 들어 설 모양이다. 일자산을 잡다한 인공적 공원으로 ‘꾸미기’보다는, 옛 마을 뒷산으로 복원·정비하여 가꾸는 자연공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며, 서울을 비롯한 도시 곳곳에 산재한 차별화된 모습과 내용을 별로 찾을 수 없는 공원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서울에 꾸민 공원이 아닌 옛 마을 뒷산 모습으로 남는 도시공원 하나쯤 가꾸는 것도 뜻 있는 일이며, 따뜻한 이야기가 되지 않겠는가?.
‘개발’이라는 명분의 인간에 의한 자연파괴와 간섭의 결과는 오늘날 각종 공해 발생과 오염의 심화, 이에 따른 생태계 교란, 이상 기후 등 참혹한 재앙의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오고 있다, 자연에 대한 인간 손길의 최소화만이 인간과 자연이 공생하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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