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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木佛
  • 입상자명 : 조현미
  • 입상회차 : 14회
  • 소속 : 일반부
  • 장르 : 일반부 시·수필
수목원에 들어선다. 나무와 나무가 반쯤 몸을 숙이고 객을 맞는 풍경이 흡사 일주문의 맞배지붕을 닮았다. 누군가 반쯤 읽다 만 경전 같기도 하고, 이마를 맞대고 선정을 청하는 구도자를 닮은 듯해 사뭇 경건해진다. 한순간 그 많은 번뇌를 벗겠냐마는 나무들이 보시하는 초록 기운에 마음이 한결 가볍다. 바람소리, 새소리에 귀 씻고 들꽃들 염화미소에 마음 얹다 보니 잠시 벗어 놓고 온 일상이 하마 옛날이다.
수목원의 주인은 누가 뭐래도 나무들이다. 나무는 끌어안을 수 있는 만큼의 하늘만 욕심내며 서로의 그늘을 침범하지 않는다. 이웃을 생각해 둥글게 등이 굽은, 이끼랑 풀, 들꽃이며 새와 곤충들에게 제 몸을 거처로 내주는 배려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자체가 살아있는 한 좌(座)의 목불이다. 울울창창한 미륵들의 미소와 눈 맞춤하며 나는 한 사람을 생각한다. 천생이 목성(木性)이라 봄처럼 따뜻했던, 다정하고 인자했으며 나무처럼 생애가 올곧았던, 아버지란 이름의…….
아흔넷의 생애를 접고 아버님은 길게 누워 계셨다. 수액이 빠져 나간 몸이 고목처럼 앙상했다. 태아가 소리로써 최초로 모계와 소통하듯 혼을 벗은 육신이 마지막까지 감각하는 건 청각이라던가. 오열에 화답하듯 고인의 손은 따뜻했다. 검고 억센 손이 꼭 나무뿌리 같았다. 당신의 손에 들어가면 모든 사물이 작아졌다. 그 손으로 척박한 한 세기를 지탱하며 가지를 뻗고 잎을 틔워 열한 자식을 거뒀을 것이다. 가지가 여럿이니 바람은 오죽 잦았으랴.
군데군데 옹이가 박혀 엿가새처럼 험한 그 손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잡아 드리던 날이 떠오른다. 아버님께서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시댁으로 향한 건 여름이 깊어지는 팔월 초순께였다. 때 이른 겨울이 든 듯 눈동자가 공허했으나 손만은 따뜻했다. 그 체온을 좀 더 오래 나눴어야 했다. 집 모퉁이를 돌아, 들깨 밭을 지나, 기와지붕이 멀어질 때까지 아버님은 그 자리에 서 계셨다. 마치 강대나무처럼…….
딸아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였다. 아버님께서 우리 집에 처음 오신 건. 쉰이 훌쩍 넘어 얻은 막내가 둥지를 마련했다는 소식에 당신은 소처럼 느껍게 울었다던가. 서른여 해를 품어 키운 자식임에도 혹여 폐가 될까 하룻밤을 주무시기 무섭게 귀가를 서두르셨다. 어느 틈에 넣어 두셨는지 베갯잇 안에 만 원짜리 지폐가 겹겹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모처럼 힘든 걸음을 하신 아버님께 ‘가장 가보고 싶으신 곳이 어디냐?’ 여쭸더니 대뜸 수목원을 꼽았다. 강원도 첩첩산중, 하늘 아래 첫 집이 바로 시댁이 아니던가. 생활의 영역 자체가 거대한 수목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하고 많은 명승지를 두고 하필 수목원일까, 그땐 당신의 깊은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수목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아버님의 차진 말씀이 이어졌다. 고유의 이름표를 달고 있음에도 내 눈엔 다 거기서 거기인 나무들의 특성을 족집게처럼 집어내셨다. 맨 처음 아버님께 간택된 나무는 수목원 입구에 서 있는 갈참나무였다. 갈참나무가 졸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굴참나무, 상수리나무, 물참나무와 동기간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계수나무 이파리를 한 장 떼어 주시더니 냄새를 맡아 보라 하셨다. 향기가 솜사탕처럼 달콤했다. 멋을 아는 선비들은 그 잎을 편지지 삼아 정인에게 속내를 전했으며 책갈피로 삼기도 했단다. 하트 모양의 계수나무 잎에 한 자(字), 한 자 연정을 수놓았을, 책을 펼칠 때마다 그윽한 낭만에 취했을 선비가 수 세기를 거슬러 향기로 오는 순간이었다. 뿐일까. 감태나무, 덜꿩나무, 노린재나무, 팥배나무, 자귀나무, 때죽나무 등 이름조차 낯선 수종이 아버지를 통해 나무라는 보통명사를 벗고 개성과 의미를 부여 받는다. 일 세기 가까이 산(山)사람으로 살아온 아버님에게 산과 나무는 곧 자신과 동격이었던 것이다.
수목원에 다녀가신 그 해 추석, 시댁 마당가에 주목 한 그루가 새 식구로 왔다. 딸애가 태어나던 날 산에 심은 걸 옮겨온 거라 했다. 살아서 천 년, 죽어 천 년을 산다는 주목 아래서 유독 많은 시간을 할애하시던 당신이었다. 주목은 원래 줄기가 썩으면 가지에서 뿌리를 내려 살아가며 죽은 나무도 썩지 않아서 고사목 상태로 천 년을 서 있다고 한다. 주목의 장수 비결과 더불어 쓰임새가 많은 특성이 하나뿐인 손녀에게 전이되길 바랐을 당신이다. 여든 터울의, 손녀를 향한 자애가 열매의 주홍빛보다 따뜻하면서도 서늘했다. 주목이 유년기를 보냈을 산의 내력이 침엽처럼 마음을 찔러 왔기 때문이다.
인근의 산 중에서 가장 높고 우람하며 잘생긴, 비를 몰고 온다 하여 ‘비(雨)산’이란 이름을 갖고 있는 산의 임자는 원래 아버님이었단다. 아홉 살, 채 여물지 않은 몸으로 농사를 시작한 이래 애오라지 땅을 파서 마련한 산은 노구를 지탱하는 버팀목이자 자존의 근원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비산은 큰집 장손에게 명의를 해준 지 얼마 되지 않아 남의 소유가 되었다. 장손이 궁색한 객지생활을 접고 고향에 뿌리내려 가문을 지탱하길 바랐을 당신이었다. 그러나 당신의 소박한 바람은 외려 사촌 간 분쟁의 빌미가 되었고, 너른 품성은 쓸데없이 넓은 오지랖의 주인이라는 비난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비산은 아주 오랫동안, 어쩌면 지금까지도 한 가계의 생채기로 머물러 있다.
추억과 동행해 그날의 동선을 더듬는다. 아버님께서 굳이 수목원으로 가족들을 이끈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이 땅에 거처하는 나무며 꽃, 풀과 백 년 가까이 동반해 온 분이 아닌가. 시큰둥한 자식들에게 ‘너희들보다 잘하는 게 내게도 있다’는 걸 은연중 자랑하고 싶으셨던 게다. 그렇게나마 추락한 가장의 지위를 회복하고 더불어(자식들이) 나무의 너른 품성을 닮아가기를 바랐을 속내를 늦어서야 읽는다.
살며시 나무의 등을 안아 본다. 그의 푸른 맥박이, 따뜻한 심성이 왼쪽 가슴께를 지나 온몸으로 온다. 그 느낌이 오로지 ‘내어 줌’의 자세로 한 세기를 일관했던 어느 한 생애를 꼭 닮았다.
눈이 부시도록 환한 그늘 안에서 한 그루 목불(木佛)로 살아오신 아버님을 뵌다. 수목원이 한 채의 도량으로 윤회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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