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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푸른 비상구
  • 입상자명 : 이미로 경기 김포 김포고 1-9
  • 입상회차 : 6회
  • 소속 : 청소년부
  • 장르 : 청소년부 글쓰기

오늘도 어김없이 지겨운 학교수업이 시작됐다. 물이 부족해 말라가는 시들시들한 화분 속 꽃처럼 우리들은 기운 없이 칠판만 바라보고 있다. 창밖으로 구름 없이 맑은 하늘만이 자신의 푸름을 자랑하고 있을 뿐.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 가을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지금의 우리는 스스로도 너무나 안쓰러울 만큼 감정이 메마르고 그치지 않는 스트레스 속에 갇혀서 힘겨워하며 지내고 있다.

“어릴 때가 좋았는데….”

나도 모르게 한마디 내뱉었다. 그래, 어릴 때가 좋았지,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지니고 살던 그때가. 검은 잉크 한 방울 잘못 떨어뜨리면 온통 검은빛으로 물들어버릴 정도로 투명했던 가슴을 갖고 살던 그때가 좋았는데.

“딩동, 딩동.”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우리는 이제 몇 시간만 더 견디면 된다는 위안 아닌 위안으로 서로를 달래본다.

“엄마, 나 왔어요.”

“응. 왔어? 우리 딸내미 오늘도 힘들었겠네.”

밤 11시가 다 되어 돌아온 나는 엄마의 품에 안겼다. 나보단 작아졌지만 변함없이 넓게 느껴지는 엄마의 품에서는 어디서도 느끼지 못하는 평온이 기다렸다는 듯이 밀려온다. 엄마의 품에선 초콜릿 같은 달콤한 향이 나는 듯하다. 후각을 자극하는 그 달달한 향은 나를 엄마 품에서 어리광부리는 아이마냥 행복하게 만들었다. 옷을 갈아입으며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어린 나를 상기 해본다. 자연 속에서 뛰노는 것을 가장 즐거워하던 평범한 꼬마였던 나, 나무의 초록빛과 어울렸고 꽃들의 무지갯빛과도 어울렸던 나의 천진난만했던 웃음을 생각해 본다.

“엄마, 내가 엄마 소원 들어줄게. 이번 주말에 산에 가자.”

소파 위에 앉아 계시던 엄마는 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신다. ‘네가 웬일로 산에 가자는 소리를 다 한다니’라고 쓰여 있는 놀란 표정이 점차 사라지고 얼굴 가득 인자한 미소로 엄마는 답하셨다. “그래.” 라고….

그렇게 해서 내 느지막한 가을 산행이 시작된 것이었다. 거창한 곳을 택하진 않았다. 그저 푸근하고 넉넉한 여유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라도 좋다고 했다. 가족 모두를 데려가자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엄마와 나, 둘만의 산행이었으면 좋겠다고 하자 엄마는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주셨다. 어릴 적 나의 순수했던 그 모습을 되찾고자 하는 작은 바람을 갖고 나는 가까이에 있는 문수산을 찾아갔다. 차에서 내리면서부터 들어오는 맑은 공기에 머릿속까지 깨끗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곳저곳 자리 잡은 나무들은 하나같이 풍성한 열매를 맺어가고 있었고 소나무 위에 옹기종기 모여 살을 찌워가는 솔방울들에서도 넉넉한 여유가 느껴져 왔다. 엄마는 무엇이 그렇게도 좋으신지 콧노래를 부르셨다.

“엄마 그렇게 좋아?”

“그럼, 딸내미 고등학생 됐다고 이젠 너랑 같이 산 구경 못 할 줄 알았는데….”

보송보송 밟혀오는 흙길은 비단보다도 더 보드랍게 느껴진다. 촉촉한 숲속의 습기들이 내 피부에 닿아 물방울 터지는 듯한 시원함을 선사했다. 나는 앞서가는 엄마를 쫓아가 손을 잡았다. 개구쟁이마냥 손을 잡고 앞뒤로 흔들었던 어릴 적처럼 또 다시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붙잡은 엄마 손은 어렸을 때 잡았던 것처럼 보들보들하지 않았다. 마치 공사장 뒤편에 놓여 있는 까실까실한 나무토막을 잡고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화살처럼 지나간 세월을 무시할 순 없었던 것인지 엄마의 손 위로는 자잘한 주름들이 늘어 있었다.

단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지금 맞잡은 손을 통해 느껴지는 온기랄까. 나는 아무 말 없이 손을 잡고 엄마와 함께 정상으로 가는 길을 밟았다. 가을의 신선한 바람은 우리가 온 것을 반겨주기라도 하듯 길게 불어왔다. 바람을 타고 오는 향긋한 풀냄새와 때늦은 매미 울음소리가 나마저도 하나의 자연으로 만드는 듯했다. 기분이 좋았다.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듯한 이 느낌. 마치 어디선가 느껴본 것 같았던 익숙한 느낌.

“엄마, 나 기분 되게 좋다? 산에 와서 이렇게 좋았던 거 정말 처음인 것 같아.”

“그래? 잘 됐네. 맨날 산 싫다고 내빼던 녀석이.”

“옛날에 엄마 뱃속에 있을 때 느낌이랄까?”

“그게 기억이 나니?”

“아니 그냥 뭐랄까, 되게 포근하고, 되게 편안한 게 꼭 그런 느낌일 것 같아서….”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이라지만 나는 어느새 정상에서 산 밑을 바라보고 있었다. 땡볕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오를 땐 낮은 이곳도 그렇게 높게만 느껴지더니 온몸을 짜릿하게 만드는 산 속의 생기 덕에 몸과 마음은 한없이 가벼웠다. 엄마는 올라오는 내내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내게 손을 대보라고 하셨다. 학교에서 매일 들려주던 주입식 교육만 받던 내게 산은 또 하나의 선생님으로 다가왔다. 차가운 나무기둥에 손을 댔을 땐 그 안에서 곧게 흐르는 굳은 심지를 배웠고 바위틈에서 힘겹게 뿌리를 내린 야생 꽃에 손을 댔을 땐 시련과 고난을 이겨내고 피어난 꽃에게서 끈질긴 투혼을 배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 가슴 속 깊이 파고들어 온 것은 사랑이었다. 자신 속에서 나무를 키우고 야생 꽃을 키우던 산은 늦은 시간 귀가하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던 엄마처럼 사랑을 베풀어주었다. 산은 자신의 큰 사랑으로 내가 잊었던 것을 다시 깨닫게 했다. 어린 시절 내가 지금처럼 산타기를 싫어하지 않았었던 것은 순수한 마음으로부터 오는 자연의 참 아름다움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 순간 어릴 적 나와 지금의 내가 비로소 하나가 되는 것을 느꼈다. 숲의 참 아름다움을 알았던 것이었을까.

“미로, 어렸을 때 같네. 철없을 땐 산 오르는 것도 암말 않고 오르더니, 딱 그때 같다.”

“엄마도 그때 같아. 그때처럼 예쁘고 젊고. 엄마 나이 거꾸로 먹는 거 아니야?”

엄마는 아무 말 않고 웃으셨다. 나도 따라 웃었다. 먼저 손을 내미는 엄마를 따라 나는 산을 내려왔다.

잃어버렸던 무언가를 되찾은 느낌이 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산을 내려오는 그 순간만큼은 엄마와 나 모두 동심으로 되돌아 갔었으리라.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닮은 푸근하고 넉넉한 여유의 공간 산과 동화되었던 그 순간만큼은 우리 또한 동심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산 향기를 몸 속에 물씬 풍겼던 문수산 산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

요즘도 무기력하고 지루한 하루는 계속 반복되고 있다. 매일이 틀에 박힌 일상생활이라 더 이상은 새롭지도 신기하지도 않다. 가끔 그런 내가 한심해 보일 때면 그때의 산행을 생각한다. 온갖 핑계로 등산을 피했었던 내가 기분 좋게 산에 올랐었던 그때를…. 자연을 사랑하고 숲에게서 많은 것을 느끼던 내 어릴 적 동심을 되찾았었던 그 시간을….

내가 또 다시 이 답답한 생활을 견디지 못할 때가 오면 나는 다시 푸른 비상구를 찾을지 모른다. 지겨웠던 내 생활에 활력소를 불어넣어줬던 엄마와의 의미 있던 그때의 산행처럼. 오늘도 나는 나를 늦게까지 기다려준 엄마의 품에 안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엄마, 내 소원 들어주러 주말에 산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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