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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깨달음의 산, 충남 가야산!
  • 입상자명 : 지홍석
  • 입상회차 : 11회
  • 소속 : 일반부
  • 장르 : 일반부 시·수필

충남 예산에는 가양산이 있다. 덕산도립공원 속에 포함되어 있는 산으로 깨달음의 산이기다 하다. 오페르트 도굴사건의 역사 현장인 동시에, 풍수지리학의 보고인 남연군 묘가 있어 더욱 유명하다.
산자락 안으로 짓쳐든다. 산의 정기가 흐르는 계류를 막아 축조한 옥계저수지가 차장 밖으로 스친다. 치산치수의 결정체라 그럴까. 유난히 맑고 푸른 물빛에 마음마저 푸르러지면서 이내 상가리에 당도한다.
산의 형세를 얼핏 가늠한다. 석문봉을 중심으로 左로는 가야봉이, 右로는 옥양봉이 병풍을 두른 듯 웅장한 기세로 마을을 감싸 안고 있다. 중첩된 산자락을 향해 품안으로 든다. 길은 두 갈래, 옥양봉 가는 길을 버리고 좌측으로 접어드니 우측 구릉의 끝 지점에 조금 높은 단이 쌓여져 있다. 명당 중의 명당,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로 알려져 있는 남연군의 묘다.
남연군 이 구는 홍선대원군의 아버지다. 몰락한 왕족으로 자신의 목숨조차도 제대로 간수하기 어려웠던 대원군은 풍수지리설의 신봉자면서 야심가였다. 그래서 전국의 명사을 돌아다니며 무너진 왕권을 회복하고 실권을 잡는 방법을 풍수에서 찾고자 했다. 어느 날, 정만인이라는 지관이 대원군을 찾아왔다.
"덕산 가야산 동쪽에 이 대에 걸쳐 천자가 나오는 자리가 있는데 여기다 묘를 쓰면 10여 년 안에 틀림없이 한 명의 제왕이 날 것입니다. 그리고 강천 오서산에는 만대에 걸쳐 영화를 누릴 수 있는 만대영화지지가 있습니다. 이 두 자리 중 어느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망설이지 않고 대원군은 가야산 자락의 이대천자지지를 선택했다.
그러나 그곳에 이미 '가야사'라는 절이 들어서 있었고, 묘를 쓸 자리에는 5층 석탑이 우뚝 서 있었다. 대원군은 우선 가묘를 쓰기로 결정을 하고, 탑 뒤에 있던 윤봉구의 사패지를 그 후손에게서 빌린다. 그리하고서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의 묘를 옮겼다. 그때가 1844년의 일이었다.
1845년, 아흔아홉 개의 암자를 거느리던 가야사에 원인 모를 불이난다. 절은 소멸되고 탑이 부서졌다. 절을 지키던 승려들은 시체가 되어 연못에서 발견이 된다. 누가 가야사를 인위적으로 폐사시킨 것이다. 대원군은 탑이 있던 자리에다 석회 3백부대를 써서 관곽을 단단하게 다지고 부친의 묘를 썼다.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서인데, 실제로 1869년(고종 5년), 통상 요구를 거절당한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에 그치기도 했다.
이장의 효험이 가시화된 것일까, 대원군의 아들 이재황은 묘를 이장한 후 18년 되던 1863년 조선의 제26대 임금 고종으로 왕위에 오르고, 1897년 '대한제국'의 광무황제로 즉위한다. 그뒤 대원군의 손자인 순종 또한 융희황제에 오르니 정만인의 예언대로 '이대천자지지'가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 셈이다.
16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역사 속에 묻힌 가야사의 흔적과 숨겨진 비화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가야사지가 있었던 남연군 묘 주변은 대부분이 개간되어 논과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사위를 휘 둘러본다. 가람을 추측하여 판정할 만한 유구(遺構)는 이미 남아 있지 않다. 눈을 감고 땅에다 귀를 기울인다. 영문도 모른 채 죽은 승려들의 비명 소리가 금방이라도 땅을 뚫고 새어 나올 것만 같다. 그들은 아직도 편히 눈을 감지는 못했으리라.
세월에 밀려가는 바람의 흔적들 사이로 기와조각과 초석으로 보이는 대형 석재가 흩어져 있다. 명당이란 무엇일까. 풍수지리설에 근거를 둔 좋은 집터나 묏자리를 의미한다지만 그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할까, 명당 중의 명당이란 효험에 대원군의 아들과 손자는 왕과 황제로 등극을 하였지만, 명당에 의해 수혜 받아야 할 대상은 개인과 국가 중 어느 쪽일까.
피를 뿌린 수많은 생명을 담보로 얻었던 묘의 기운이, 주변 열강의 구도를 재편 하였던 건 아닐까, 두 명의 황제를 내었지만, 그것이 조선의 국권을 일본에게 찬탈당한는 빌미가 되었다면 그 책임은 과연 누가 져야 할 것인가, 일본의 오랜 책략과 의도대로 '대한제국'이 수립되었다는 기록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고종과 순종황제 재위 14년 만인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일본에게 나를 빼앗겼다. 일본천황의 조서로 고종황제는 태왕으로, 순종황제는 이왕으로 격하된다. '이왕가'라는 명칭을 사용하도록 강요당했고 대한제국 왕실을 일본 천황가의 하부단위인 왕과공으로 편성해 일본 국내성으로 귀속시켜 버렸다.
왕족의 신분으로서 사욕에 얽매어 인명을 해하면서가지 권력을 재편하려 했던 과욕이 문제였다. 우리 민족에게는 역사에 돌이킬 수 없는 오욕의 상처를 주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 비극적 행위들이 나라 전체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한 번쯤 되짚어 봐야 하지 않을까.
근래에 이곳 주변에 관심을 끌 만한 일이 하나 생겼다. 남연군 묘에서 상가 저수지 우측으로 400여 미터 오르다 보면, 옥양봉 지능선 쪽으로 새로운 묘지가 생긴 것이다. "터"의 작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풍수지리학의 대가 S의 묘다.
그는 죽어서 무엇을 얻으려고 남연군 묘 위쪽에 묻힌 곳이 덕산도립공원 내 가야산 자락이고 보면, 그는 죽어서도 후손에게 나라의 법을 어기도록 사주한 조상이 되는 셈이다.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을 죽어서도 그 끝이 없음이 안타깝다. 아무리 좋은 취지의 행위라도 개인의 공명과 직계의 후손에게만 미치는 것이라면 격코 좋은 것은 아니다. 나와 내 가족의 개념보다는 다수의 개념, 사회와 국가, 인류 전체의 이익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아닐까.
석문봉 주변의 능선에 올라 옥양봉 지능선 아래를 내려다본다. 남연군의 묘도, S의 묘도 발아래 보이는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 풍수는 과연 어느 선까지 믿어야 하는 것인지.. 그 의문을 품기도 전에 사한 지점인 개심사에 당도한다. '마음을 여는 절'이라 그럴까, 남연군과 육관도사의 묘를 둘러봤을 때 어두워졌던 심사가 조금은 풀리고 열리는 것 같아 한결 마음이 개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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