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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내 베개에는 아버지가 산다
  • 입상자명 : 이영혜
  • 입상회차 : 15회
  • 소속 : 일반부
  • 장르 : 일반부 시·수필
파프리카 네 쪽, 오이 한 개, 신문, 책, 생수 그리고 견과류 약간.
출석을 부르듯 하나하나 배낭에 챙겨 넣고 집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의 편백 숲으로 향했다. 구불구불 오르는 길섶으로 지루한 초록 일색인 여름을 장식해주는 개망초꽃이 잔잔한 얼굴로 계절의 배경이 되고 있었다. 며칠만 지나면 저 자리엔 보랏빛 용담이나 각시취, 쑥부쟁이가 대신할 것이다. 작년에 우연히 만난 투구꽃을 올해도 만날 수 있을까? 깊은 산에서만 볼 수 있는 그 꽃이 얼마나 반가웠던지 허리를 숙여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꽃들과 정다운 눈인사를 나누고 아래쪽을 더듬어 내려가 보았는데 지난 여름, 콸콸 흘러내리던 계곡물은 폐경이 된 여자의 그곳처럼 바짝 말랐고 노루오줌꽃이 ‘괜찮으신가요?’ 고개를 기울이며 안부를 물었다. 혹독한 가뭄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의연히 제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부지런하게 몸을 움직이며 만물을 쓰다듬는 바람의 손길을 느끼며 한 평 반 남짓 되는 편백 숲의 평상에 자리를 잡았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종종대며 살았고, 그리하여 병을 얻은 내 삶을 자연의 고유하고 느긋한 시간에 맞추어보고자 찾는 단골 장소이다. 나는 인디언의 달력처럼 나만의 그 장소를 ‘천사가 날개를 빗질하는 곳’이라고 명명했다. 만물의 근원이라 여기며 경외하던 자연이 개발의 걸림돌이라 생각하는 요즘, 깨어 부서지지 않고 오래 오래 남아 엉킨 내 마음을 언제든지 가지런히 빗질하여 주기를 바라면서….
자리 옆의 편백나무 열매 하나를 집어 냄새를 맡아보았다. 베개가 되어 나의 불면의 밤을 내내 지켜주고 있는 익숙한 내음. 몇 년 전, 지금은 먼 강을 건너가신 아버지가 맡고 싶어 하셨던 그 향! 그 당시 나는 편백나무 숲이 어딘지, 어떤 효과가 있는지 모른 채 아버지가 “나 같은 사람에게 편백 숲이 좋다더라.” 하시며 가고 싶어 하시는 편백 숲을 찾다가 미숙한 운전을 핑계로 산을 서둘러 다시 내려왔었다. 아버지 몸의 뼈 구석구석에 퍼진 암세포가 편백 숲에 온다고 사라진단 말인가? 하며….
아버지가 산에도 머무를 수 없는 마른 몸이 되었을 때 내 몸에도 암이 자라고 있음을 알았다. 인터넷에 ‘피톤치드의 효과, 편백 숲의 효능’이라는 단어를 쳐서 검색을 해 보고서야 편백 숲에서 나오는 피톤치드는 수목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분비하는 살균물질이라는 것과 균들에게 내성을 생성하지 않는 항균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이란 얼마나 자기중심적이란 말인가? 나에게 피와 살을 나누어주고 자식의 죽음도 대신하고 싶어 하는 아버지의 병은 아랑곳없이 내 몸의 병 앞에서는 적진을 향하여 진군하는 병사처럼 이 것 저 것 가리지 않고 좋은 것은 다 해보고 싶어 하다니….
어느 날, 항암치료로 듬성해진 머리카락을 숨기려 모자를 쓰고 아버지의 병실을 드나들던 나의 핏기 없는 얼굴을 보시고는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는 물음에 젊었을 때부터 괴롭히는 편두통 때문이라고 얼버무렸다. 병원에서는 더 할 것이 없다는 의사의 권유로 퇴원 후 아버지는 주위사람들에게 물어보고 편백 숲을 알아내시고는 편두통을 앓는 딸을 위해 편백 열매를 주워 베개를 만들어 주셨다. 그 작은 열매를 주워 베개 하나를 만들기 위해 온 몸 가득한 암의 통증을 참으며 얼마나 많이 허리를 굽혔을지…. 항암주사를 맞고 나면 시도 때도 없이 올칵올칵 게워내는 구토와 바이킹을 탄 것같이 어지러운 증세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아는데….
편두통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 때 베개는 유년의 억센 아버지 손이 되어 뭉친 어깨와 목덜미를 주무르고 잠들기 힘들 때 열매의 향은 바늘처럼 뾰족 솟은 마음을 녹차보다도 더 부드럽게 가라앉혀 수면을 유도하기도 한다.
베개 속에는 아버지의 시간으로 가득하다. 당신의 남은 시간을 헤아리고 아픈 통증을 참으며 열매를 주운 시간, 그늘에 잘 펴 말리며 기다린 시간, 어머니와 잘 여문 것을 고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 따뜻한 시간, 재봉틀로 베개를 박음질하는 어머니 옆에서 귀여운 잔소리하셨을 시간, 그 시간의 힘으로 난 암환자가 초조하게 기다리는 5년을 이제 몇 개월 남기고 있다.
다시 한 번 뱃속 가득 배부르게 편백나무의 피톤치드 몇 모금 마시고 부잣집의 값비싼 침대보다 좋은 숲에 누워 무심히 흘러가는 하늘의 구름을 새어 보았다. 인간의 시간이 잠시 멈춘 듯한 곳에서 법정 스님이 즐겨 읽으셨다는〈월든〉을 펼쳐 들었다. 월든 호숫가에서 단순하고 소박하게 사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삶을 부러워하며 읽다가 목덜미에 어릴 적 외할머니의 부채질에서 나오는 기분 좋은 바람을 느끼며 잠깐 잠이 들었다. 환한 꽃이 피던 내 삶의 뒤란이 아주 섧게도 적막해진 요즘의 우울을 잊은 채…. 모처럼의 단잠에서 깨어 보니 열대야로 밤새 뒤척여 무겁게 젖은 몸이 가벼워졌다.
정채봉의 시〈엄마가 하루만 휴가를 나온다면〉에는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고 했지만 내 아버지가 단 하루만 휴가를 나온다면 배낭 속에 당신이 좋아하셨던 막걸리와 김치를 챙겨 그 날 찾지 못했던 편백 숲으로 모시고 와서 나란히 누워 하늘을 보고 싶다. 통증을 잊기 위해 나지막이 부르시던 현철의 노래 〈내 마음 별과 같이〉가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노랫말처럼 아버지도 저 하늘 별이 되어 우리들 가슴에 영원히 빛날 것이다.
어둑해진 숲을 나오자 서녘 햇살이 ‘반짝’하며 멈춘 시간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두려워 말자. 오늘밤도 내 베개 속의 아버지가 나와 큰딸의 이마에 잠을 풀어 놓고 건강과 원기를 선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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