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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 입상자명 : 송은경
  • 입상회차 : 12회
  • 소속 : 일반부
  • 장르 : 일반부 시·수필

물길이 말랐다. 바닥이 훤히 드러난 소쇄원 계곡에 바위와 돌멩이 들이 여실히 그 모양을 드러낸 채 또 하나의 풍경을 만들었다. 젖듯말듯 조용히 내리는 가랑비에 그래도천천히 풀들이 젖고 돌들이 젖는다. 흐르지 않고 단지 젖을 뿐이다.
아마도 이 비가 저 계곡을 채우려면 수십 년을 내려야 할 것 같다. 천천히 내리는 비를 맞으며 제월당 마당에 나는 섰다. 뒤로는 산이 감싸고 앞으로는 계곡이 막고 있는 소쇄원 제월당 앞마당 풍경에 넋을 잃고 앉았다. 신록이 우거져 계곡이 막고 있는 소쇄원 제월당 앞마당 풍경에 넋을 잃고 앉았다. 신록이 우거져 계곡 너머에서는 자세히 보이지 않던 집이 외나무다리를 건너고 보니 탐나게 들어 앉았음이다.
스승의 유배와 죽음을 보고 낙향한 제자 양산보는 소쇄원 풍경 안에서 그 마음을 온전히 가라앉혔을까. 시대의 불만과 내면의 갈등이 자연으로 녹아들어 편안히 살다 갔을까. 모를 일이다. 기록에는 그의 마지막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제월당과 광풍각의 풍경만으로 그의 낙향한 삶이 정계의 삶보다 풍요로웠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내 안의 갈등과 소요를 묻어둘 언저리를 빌리고자 나는 이곳에 왔으므로
소쇄원(瀟灑園)은 올곧은 선비 정원이다. 화려하지 않게 조용히 포개놓은 층층의 돌담고 기와가 자연스럽다. 어디에 서든 모든 것에 막힘이 없다. 동서남북 어느 쪽으로도 나의 선이 끝없이 가 닿을 수 있다. 그 마지막 시선에 언제나 자연이 펼쳐진다. 신록이 우거진 유월의 담양은 편안하다. 마당을 뛰어다니는 다람쥐 두 마리가 인기척에도 놀라지 않고 제 길을 찾아다니는 모양조차 용감하다. 시선에 상관없이 나는 나의 길을 얼마나 바로 걸어왔을까.
흔들렸다. 채우지 않고 앞으로만 달려왔기에 나는 심하게 멀미를 했다. 군데군데 구역질 나는 속내를 게워놓고 지저분하게 살았다. 올곧게 뻗은 대나무가 아니라 휘어진 마디로 대나무의 기개를 드러낸 지난 삶이 옹졸하고 부끄럽다.
건강하시던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지셨다. 수년 전부터 물질적인 어려움으로 힘들어 하시다 결국 몸이 마음을 이겨내지 못하니 병이 찾아왔다. 응급실에서 수삼 일을 보내는 동안은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긴 병으로 병원 생활이 길어지면서 차츰차츰 흩어지는 나의 초심이 내게 가장 먼저 보였다. 조금씩 의식을 찾기 시작하는 어머니의 곁에 아들 셋과 딸 그리고 며느리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그러나 병실에 누워 계신 어머니의 그 자리에 오직 나의 몸과 마음만은 비어 있었다. 직장과 병원을 오고 가는 남편의 모습이 존경스러워야 하건만 나는 그조차도 용납이 안 될 만큼 마음자리가 단단히 굳어져 버렸다. 어머니의 퇴원과 함께 통원치료가 시작되었지만 남편은 그 먼 길을 혼자서 왔다 갔다 하며 어머니를 모셨다.
집이 불타 잿더미에서 생활하는 나와 자식들을 버려두고 시골로 향하는 남편에 대한 원망이 어머니 때문이라고 여겼다. 힘들다 소리 못하는 남편이 밉고 말하지 않는다고 관심조차 없이 십수 년을 모른척하는 어머니도 미웠다. 형님들의 어려움에만 눈이 먼 어머니의 사랑과 관심이 물질로만 보였던 그때 가치로 보자면 나는 내버려진 며느리요, 남편은 버려진 자식이었다. 세상살이에 깊이 빠져 넓게 두루두루 보는 눈이 부족했떤던 나의 어리석음 때문이었다.
못된 며느리의 불효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빠르게 회복되어 건강을 찾으셨다.
시골집 너른 마당에 또다시 발걸음을 딛고 세상을 보고 계신다. 그 걸음이 회복되면서 어머니는 내게 유달리 부드러워지셨다. 이렇다 저렇다 하던 간섭도 않으시고, 점점 침묵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아마다 그 묵언의 시간 속에서 나는 조금식 오그라들고 있었던 것 같다. 기울어진 모습이 여실히 드러날 때마다 나는 괴로웠다. 말없이 지켜보는 남편을 바라보는 것도 내겐 힘겨웠다. 모두가 나를 바라만 보고 있는데 나는 숨이 막혔다. 가타부타 말을 넣을 때보다 오히려 침묵하는 가족들이 더 감옥처럼 나를 힘들게 했다.
툇마루가 제법 높다. 댓돌에 올라서야 비로소 엉덩이가 걸쳐진다. 가파르게 내지른 바로 앞이 수직으로 떨어지는 계곡이다. 계곡의 물길이 조금씩 모이고 있다. 살금살금 고양이 걸음처럼 조용히 내리던 비가 어느새 모여들었다. 물길을 만들어 소리를 채우며 흐른다. 높은 툇마루에 불어오는 바람도 제 길을 따라 흘러와 내 몸 부딪히고 하릴없이 사라진다. 자연스럽다. 길게 이어진 툇마루도 제 딴엔 제 몸이 만들어낸 마루길이다. 선비들의 학문을 논하던 마루길 뒷산에 산길이 이어진다. 산길로 들어서는 뒷담장 아래에 세 잎 클로버가 몸을 펼치고 있다. 모든 것들이 말없이 제자리에 충실하다. 그래서 아름답다. 평화롭다.
나의 길도 여러 갈래다. 하고 싶지 않았던 며느리의 길이 부서지고 나니 아내의 길도 어머니의 길도 온전치 않다. 소쇄원의 풍경이 사람을 부르는 이유는 게 각각의 길들이 바르게 나 있기 때문이다. 물길이 제자리에 잡혀 있고 마당길, 담장길, 툇마루 길과 심지어 바람길 조차도 함부로 넘나들지 않고 제자리를 지켜 흘러 다니는데 사람의 길이야 오죽하겠는가.
한달에 한 번 남편은 여전히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을 간다. 한 달 치 약을 받아 드신지 벌써 일년이 넘었다. 복숭아 희뿌연 살결 같던 피부가 독한 약 때문에 시커맣게 변해 버렸다. 힘든 몸으로 농사지어 내 손에 쥐어주신 참기름을 나는 아직도 뚜껑을 열지 못하고 있다.
준비 없이 떠난 여행이라 우산도 없이 와 버렸다. 오랜만에 맞아보는 가벼운 비가 기분이 좋다. 소쇄원의 맑고 깨끗한 기운이 내 안에 들어올 수 있게 몸을 씻어주는 것 같다.
지나쳐 버린 길을 되돌아가는게 쉽지는 않다. 물길이 거슬러 올라가지 못하니 나는 오늘 맘껏 비를 맞고 세상에 지든 몸이라도 설렁설렁 씻어내고 싶다. 뒤죽박죽 엉켜버린 내 안의 길이 오늘 문득 다듬어지짖 않을지라도 무너진 인간의 길, 자연의 길로 단장하고 싶어 나는 오래 툇마루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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