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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할머니의 숲
  • 입상자명 : 김 보 람 대구 경일여자고등학교 2학년
  • 입상회차 : 3회
  • 소속 : 청소년부
  • 장르 : 청소년부 글쓰기
쳇바퀴처럼 똑같은 하루가 흘러간다. 나는 오래된 습관처럼 버스를 타고, 익숙한 자리에 앉아서 익숙한 풍경들을 바라본다. 잠깐 잠이 들었던 걸까. 나는 문득 열어 놓은 차창 사이로 흘러오는 희미한 향기를 느끼며 눈을 떠본다. 창 밖으로 어둠을 삼킨 듯이 검푸른 산이 보였다. 유니버시아드 대회로 통제된 도로 덕분에 어쩔 수 없이 먼 길로 돌아가야 한다는 기사 아저씨의 말을 멀어지는 길과 함께 흘려보내며 나는 바람에 가득 담겨오는 옛 추억의 자취를 밟았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작은 만화방을 운영하셨던 엄마는 종종 나를 할머니댁에 맡겨 놓곤 하셨다. 동네의 가장 구석진 골목을 돌아 들어가면, 허름한 기와지붕부터 빼꼼히 보이던 작은 집. 입구의 재래식 화장실에서 풍겨나오는 고약한 악취와 바람에 간간히 불어오는 풀내음, 간혹 들려오는 동네 개들의 울음소리를 빼고 나면 할머니의 작은 집은 그야말로 적막 그 자체였다. 나는 텔레비전도 인형도 없는 텅 빈 마루에 앉아 하품을 연신 해대며, 할머니의 설거지가 끝나기를 기다리곤 했다. “할매! 오늘은 나물 캐러 안 가나?” “가시나. 니는 맨날 나물 캐러 가자 카재? 좀 있어봐라.” 말은 퉁명스럽게 하셨지만, 할머니는 젖은 손을 닦지도 않으신 채, 부엌에서 나와 내 작은 손을 그러쥐셨다. 그 조용하기만 한 집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가장 재미있는 놀이는 할머니와 함께 집 뒤의 작은 동산에 올라가는 것이었다.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던 샛길을 쭉 걸어가면 총총히 줄 지어선 작은 나무들이 있었고, 조금 더 걸어가면 이내 큰 나무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산길을 잿빛 그림자로 수놓고 있었던 할머니의 숲…. “보람아, 이 쪼매난 나무로 이쑤시개 만드는 거 아나? 저거 하나하나 짤라 가지고 공장에서 칼로 갈아서 사람들한테 파는 기다.” 잎이 스페이드 모양으로 생겼던 이름모를 나무들이 하나둘 보이면서, 할머니의 이야기 타래는 한 가닥씩 풀려지기 시작했다. “이거는 씀바귀카는거. 먹으면 억수로 쓰데이. 근데 옛날에 느그 아부지랑 삼촌들이랑 많이 뜯어 묵었다. 그때는 이거 밖에 없었거든.” 씀바귀, 질경이, 망초, 쑥, 냉이…. 귓가에 익숙해진 이름들을 하나하나 불러가면서 길을 오르다 보면 유난히 나무가 우거져서 어두컴컴한 그늘로 뒤덮인 길목에 다다르게 되는데, 할머니와 나는 그곳을 ‘뱀골’이라고 불렀다. 할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그 숲에는 신령님이 살고 계시는데 사람들이 뱀딸기를 함부로 따 가지 못하도록 많은 독사들을 풀어놓았다고 한다. 할머니는 그런 뱀골에 들어가서 뱀딸기를 따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할머니가 숲의 신령님과 특별한 친분이 있으셨던 건지, 아니면 독사를 능히 물리칠 수 있는 요력을 갖고 계셨던 건지. 나는 그 동안 읽은 동화책의 내용을 낱낱이 떠올리며 오직 할머니만이 뱀딸기를 딸 수 있는 이유를 추리해 보았지만, 결국 아무 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의문이 극에 다다랐던 어느 여름날, 나는 할머니 몰래 집을 빠져 나와 숲으로 향했다. 그 무시무시한 뱀골의 입구에서 나는 크게 숨을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딛었다. 녹음 사이로 불어오는 싱그러운 바람에 어느새 두려움은 사라졌다. 사방을 둘러봐도 독사는 보이지 않았고, 나는 빨갛게 익은 뱀딸기 몇 개를 골라잡아 의기양양하게 숲을 나섰다. 순간, 누군가가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나는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삐죽 솟은 나뭇가지에 옷이 걸렸던 것이었다. 나는 슬며시 떠오르는 두려움을 애써 진정시키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일념으로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신령님은 당신의 소중한 뱀딸기를 훔쳐가는 당돌한 꼬마를 그냥 내버려두지는 않으셨다. 기어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내 눈에 뱀딸기만큼이나 붉은 피가 흥건히 고여 있는 무릎이 보였다. 무릎의 얼얼한 통증과 더불어 신령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두려움에 나는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몇 분이 지났을까. 흐린 시야속에 허겁지겁 달려오시는 할머니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 놈의 종내기. 니 혼자 뱀골은 와 들어갔노? 담에 또 갈래?” 할머니의 등에 업혀 집으로 향하면서 나는 다시는 뱀골에 들어가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후로도 나는 할머니와 함께 산길을 올랐다. 뱀골은 여전히 두려운 존재였지만, 숲속으로 들어서는 순간 온몸으로 옮아오는 신록의 푸르른 향기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은밀한 즐거움이었다. 아직도 내 기억속에는 몇 개의 풍경들이 선명히 남아 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쑥줄기를 움켜쥐고 쑥떡을 만들러 가야 한다고 할머니의 치마폭에 매달리던 일. 길쭉하게 생긴 빨간 꽃을 쭉 빨아먹으면 달콤한 꿀이 나온다는 걸 알고서 두 손 가득 꽃을 따다가 할머니께 꾸중을 들은 일. 그때 할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 같다. 숲에 있는 꽃들을 함부로 괴롭히면 신령님께서 큰 벌을 내리신다고. 뱀딸기 때문에 한 번 호되게 당한지라 금세 겁을 먹고는 한 동안 꽃들을 하나하나 쓰다듬어 가며 예쁘다, 예쁘다 속삭여 주었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러나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나는 대구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할머니의 숲은 앨범 한 구석의 빛 바랜 사진으로만 남아 버렸다. 그리고 얼마 전, 방학을 맞아 오랜만에 할머니댁을 찾아갔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지붕과 퀴퀴한 냄새는 그대로였지만, 내가 그렇게도 그리워했던 할머니의 숲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쭚쭚주차장’이라는 파란색 표지판 옆에 몇 개의 해바라기 줄기만이 예전의 녹음을 증명이나 하려는 듯 을씨년스럽게 몸을 흔들고 있을 뿐. 나는 황량한 풍경 앞에서 불도저에 아스러져 갔을 작은 숲과 결국은 숲을 지켜내지 못한 신령님에 대한 원망을 던지며, 쓰디쓴 한숨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향그러운 나무 내음이 콧속 가득 울린다. 지금은 어둠을 삼키고 있는 저 산도 언젠가는 차가운 불도저에 삼켜질 날이 올지 모른다는 기우와 더불어, 내 서랍 속에 고이 간직해둔 할머니의 숲도 멀어져간다. 아쉬움인지 그리움인지 모를 미묘한 설레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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