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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선 월정사 전나무 숲길에서
  • 입상자명 : 김인숙
  • 입상회차 : 13회
  • 소속 : 일반부
  • 장르 : 일반부 시·수필
우리 집에서 50km 정도 가면 어머니의 품 같은 월정사 전나무 숲길이 있다. 친정어머니를 뵈러 가듯 마음은 흥겹다. 여자에게는 어머니가 있는 친정은 맘 놓고 쉴 수 있는 곳, 아무리 어머니가 늙었다 하여도 계심으로 하여 얼마나 의지가 되고 갈 곳이 있다는 것으로 맘이 놓이는가!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마음이 심란하거나 화가 나고 외로울 때 어머니 계신 친정을 가듯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간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어머니가 마중 나와 반기는 듯하다. 아무 때나 가도 두 손을 마주 잡으며 왔냐! 하며 얼굴 내색을 살피는 어머니. 행여 사위와 싸우고 온 것은 아닌지! 아니면 집에 안 좋은 일이 있는지! 얼굴로 일상을 살피시는 어머니의 따뜻함처럼, 월정사 전나무 숲은 나를 반긴다. 금강교를 지난다. 마치 어머니가 계신 피안의 세상으로 가듯 흙길은 부드럽고 숲에선 향기가 그득하다. 햇볕이 틈 틈으로 와 비추면 연인들의 행복한 모습처럼 웃음이 가득하고 바람이라도 불면 속삭임처럼 감미롭다. 소리라도 지르고 통곡이라도 해야 분이 풀릴 것 같은 마음도, 월정사 전나무 숲길만 가면 봄눈 녹듯 녹고, 금세 얼굴에 분이 풀린 너그러운 평안한 모습을 한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마음이 풀리면 찡그린 얼굴 근육이 평안하게 바뀜을 알 수 있다. 누구에게 해도 마음이 풀리지 않고 무겁지만, 숲에 가면 말 한 것도 아니고, 화풀이를 한 것도 아니어도 그냥 풀린다. 숲은 서로 겨루지 않고, 비교하지 않으며, 자기를 존중하며 역할을 다 하기에 평화롭고, 숲에는 자신의 역할만 있을 뿐, 그 역할을 다 하였다 하여 공치사 하는 일도 없고, 비교하여 시샘을 하거나 자책하는 일도 없으며 누구에게 잘 보이려는 속셈도 없고, 다만 자신을 사랑하며 자신에게 성실하는 자기 존중만이 있을 뿐이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은, 자신을 모르고 자기 있을 곳도 모른 체, 비교하며 거미처럼 다리를 가지고, 나는 것을 잡으려 거미줄을 치고 사람만이 공치사를 한다. 숲에 가면 비로소 나는 사람이 된다. 그 모든 것을 그냥 내려버리는 것이다. 매혹적이지 않지만 평화롭고, 자극하지 않지만 전신을 깨우는 흙냄새, 풀냄새 나무냄새, 코를 흥흥거리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얼굴은 웃음이 가득하고, 가장 아름답고 개운한 나를 보듬어서 행복하다. 시장 통에는 살아가는 사람들이 왁자지껄 하여도, 그 사람들이 숲으로 오면 모두 조용하다. 신성한 성지에 온 것처럼 겸손하며 모두가 자신을 돌아보는 것 같다. 백인백색의 사람이 와도 모두 소리를 내지 않고, 그냥 하나의 마음으로 걷는다. 이어폰을 나누어 끼고 걷는 연인들도, 어른도 아이도, 맨발로 걷는 교무님도, 수녀님, 스님도 모두 밖을 보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보고 간다. 그곳이 월정사 전나무 숲길이다. 월정사 전나무 숲길엔 오래된 전나무가 선 채 죽어 있다. 스님께서 걷기 명상을 하다가 그대로 선종하신 것일까! 몇 백 년 살다가 간 전나무 속이 텅 비어 있는 것처럼,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그냥 텅 빈다. 탄허 스님께서 다언(多言)은 사자(士子)의 병이 되고 번문(煩文)은 도가(道家)의 해가 된다며, 도를 밝힌 말이라도 다언과 번문은 해가 된다고 하신 말씀처럼, 그래서일까! 월정사 전나무 숲길에 가면 아무 생각도 없이 오감만 살아 있고 나는 잊어버린다. 그래서 좋다. 나도 잊어버리는 세상, 생각이 없는 세상은 본질만 있다는 는 것, 월정사 전나무 숲길에는 본질만 있고 사념은 없으며, 적정한 사랑의 거리가 있다. 많은 식생들이 서로 얽힌 듯하여도 얽히지 않고, 서로 배려의 몸짓만 있을 뿐, 자기를 위해 악다구니 쓰는 소리는 없다. 그래서 숲길에 가면 나모 모르는 사이에 차분하고 마주 오는 사람에게 피해가 되지 않을까! 서로 우축으로 걷게 되는 것이다. 숲에 가면 모두 자기 있을 곳에 있다. 빛을 좋아하는 나무 곁에 빛을 좋아하지 않은 작은 나무가 서고, 또 그 작은 나무가 서고, 모두 질서를 지킨다. 사람처럼 남의 자리를 탐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만족하여 아무리 작고 볼품없다 하여도 자기를 존중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를 존중하지 않고 남과 비교하며 시샘을 하고 욕심을 부리며 화를 끌어안고 살아 삐거덕 거리는 소리가 나기 일쑤다. 자기를 존중하며 다름이 화합이 되는 숲, 그래서 숲길을 걸으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다름은 틀림이 아니라, 다름으로 서로 조화가 될 수 있게 자기를 다스려야 함을 알게 된다. 숲길을 가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고 듣지 않아도 깨우칠 수 있는 지혜를 준다. 서로를 위해 비켜서고 상생하는 숲, 무념이 되는 까닭도 나를 잊은 최상의 정점이다. 우리는 행복할 때 잊는다. 부모님 계실 때 잊고, 아내, 남편이 있을 때 잊고, 아이가 제 자리에 있을 때 잊어버리듯, 잊어버릴 때가 행복의 정점이다. 생각을 하는 것은 염려다. 그리고 부족함이다. 그런데 숲에 가면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잘 있어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것, 새들이 날기 위해 빨리 배설을 하듯. 숲에 가면 날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비우고 새가 되어 있는지 모른다. 오대산 전나무 숲길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걷는다. 정상이 없어, 정상에 오르려 발버둥 거리지 않고, 정복했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가장 편안한 자세로 편안하게 걸으면 된다. 친정어머니가 계시지 않아서 서울이 텅 빈 같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평창(강원도)으로 이사 와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걸으면 돌아가신 어머니가 돌아와 내 얼굴을 살피며 건강이 좋아졌는지 더 안 좋아졌는지 확인 하시며 “후유증은 없쟈?” 하시며 내 등을 목을 팔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런 눈빛을 하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 때가 있다. 교통사고로 경추가 탈골이 되고 요추가 골절이 되어, 목에는 뼈 대신 쇠가 박혀 있고 한동안 왼어깨 마비로 육체적 아픔보다 정신적인 고통으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육체적 마비는 정신을 마비시키고 말았다. 가족들의 도움과 운동으로 마비라는 육체의 무감각은 감각을 찾았고, 정신도 마비에서 벗어났지만 이제는 왼어깨가 칼끝으로 찌르듯 아프다. 우울하고 의욕이 없다. 왜 나에게만 이런 고통이 있냐고 원망을 하고 있다.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걷다가 아프다는 것은 장애가 없어졌다는 큰 사실을 알았다. 순간 환호라도 지르고 싶었다. 오른손으로 왼어깨를 주무르고 걷다가 집에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행복을 전하고 싶었다. 그냥 통화를 하고 싶었다. 남편도 느꼈는지. “무슨 좋은 일 있어?” 하고 묻는다. “응” 하며 “월정사 전나무 숲 길 너무 좋아서요.” 했지만 그 순간 “왜 나에게만 이런 고통이냐고” 하던 원망에 답을 얻었다. 나는 아주 나쁜 사람이었다. 나는 사고 나서 다치면 안 되고, 남은 다쳐도 된다는 못된 마음이 부메랑으로 나를 찌르고 있었다. 나는 화살을 당기는 것을 놓았다. 이젠 아픔이 행복이다. 블록 쌓기 두 개도 올리지 못하고 쓰러트리던 그 비극, 그때는 어깨가 아프지 않아 마음이 불구덩이에서 헤매고 있었는데, 아픔을 축복으로 여기지 못하고 아프다고 화를 내고 있었었다. 아프다는 것은 왼팔을 쓸 수 있는 무엇보다 큰 행복이다. 의사도 경추 탈골은 하반신 마비인데 어깨만 마비인 것도 사후 처리를 남편이 너무 잘해 천운이라고 하셨다. 천운, 그것은 아픔을 주는 것까지였다. 그런데 모르고 있었다. 나는 지금 왼어깨가 힘은 부족하고 아프다. 정말 천운이다. 아프다는 것은 팔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금강교를 건너 나온다. 피안은 내 안에 있었다. 내 마음에 가려 보지 못하다 가린 마음을 월정사 전나무 숲길에서 걷어냈다. 왼어깨가 칼끝으로 긋듯 아프지만 행복하다. 워드를 양손으로 치고 두 팔로 일상을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삶을 살 수 있다, 왼팔의 아픔이 준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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