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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선 이끼
  • 입상자명 : 김영미
  • 입상회차 : 13회
  • 소속 : 일반부
  • 장르 : 일반부 시·수필
아침부터 흥무대왕능이 있는 숲을 찾았다. 오래된 소나무들이 성역처럼 능을 지키고 있다. 비각 앞에 목백일홍의 새순이 순록의 뿔마냥 자랑스럽다. 잠시 신라 왕관이 자라는 듯 착각을 한다. 천 년을 살았음에도 변화가 그다지 심하지 않는 숲이 편안하다. 서너 걸음 들어가자 소나무 가지가 허공을 향해 죽죽 뻗어 있다. 비 뒤에 오는 음습한 향이 먼저 코끝에 와락 달려든다. 가까이 이런 환경이 있어 행운이라 여기며 평소에도 가끔 찾았었다. 오늘은 엄마와 왔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엄마와 같이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다. 먼 곳도 아닌데 엄마한테는 왜 그리 인색한 마음이었는지 뒤늦은 후회가 든다. 묵은 삭정이와 솔잎이 떨어져 만든 자리에 엄마와 앉았다. 소나무의 시큼한 향이 새삼 코에 다가온다. 나무에서 나는지 엄마에게서 나는지 분간이 어렵다. 소나무는 오월을 맞아 가지 끝마다 새 촛대를 달았다. 해마다 불을 밝힐 준비를 하는 그것들은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기다림이다. 항상 준비된 자세 그대로이다. 햇볕이 뚫은 땅에는 노란 송화 가루가 떨어져 물감을 만든다. 빗물을 따라 결을 이룬 금빛이 무엇을 그리려 했는지 미완으로 남았다. 내 마음에도 마감하지 못하는 감정이 기복을 달리하며 그려지고 있다. 엄마와 나누지 못한 많은 것들이 얽히고설킨 추상화가 되어 양심을 자극한다. 엄마는 땅속에라도 스며들 것 같다. 말라버린 댓잎 같은 몸피에서 웅크린 비명이 새어난다. 송화 빛 얼굴에 식은땀이 흐르고 고통을 참는 듯 주름이 찡그러진다. 꼭 안고 머리를 쓰다듬는 것 외엔 어떻게 해 드릴 방도가 없기에 고개를 돌려 눈물을 흘렸다. 잠시나마 현실을 잊게 하기 위해 엄마의 시선을 붙들 무엇을 찾았다. 눈물로 흐릿해진 내 눈에 소나무 밑동에 이끼가 보인다. 융 담요를 연상시키는 그것들이 땅을 덮고 있다. 나무와 동무하는 바위도 퍼렇다. 나무나 바위 밑에 자리한 흔한 이끼가 새삼 내 눈을 붙들고 퍼런색이 가슴에 멍처럼 번지며 먹먹해진다. 이끼는 나무가 하늘만을 바라보도록 안아주는 모습이다. 이끼가 끌어안고 있는 나무는 가뭄에도 축축한 수분을 유지해 마르지 않고 잘 지낼 수 있는 것이다. 또 한 움큼의 흙도 소중한 듯이 온 몸으로 뿌리를 보호하기 때문에 폭우 때에도 쉽게 상처가 나지 않는다. 나무 잎이 울창해질수록 짙어진 그늘로 점점 더 잊힐 것인데도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제 일을 해나간다. 도리어 붙들고 있는 나무가 자라는 것을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한다. 항상 낮은 곳에 자리 잡아 축축한 물기를 빨아들여 푸근하고 폭신한 자리로 만들어 내어주기까지 하는 이끼가 나의 엄마를 닮았다. 엄마는 쉴 틈이 없었다. 비가 오거나 궂은 날도 맹렬히 바닥을 기어 미래를 대비한 방편을 했었다. 보호막이 되어 준 엄마 덕에 나는 꿈을 가질 수 있었고 숲을 이룰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지나치게 낮은 몸짓의 엄마를 부끄러워했던 적도 있었다. 진달래처럼 고운 꽃나무면 했었다. 푸르기만 한 엄마를 닮지 않겠다며 속을 헤집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세상살이 서러울 때면 제일 먼저 엄마를 찾아 폭신함에 마음을 녹이고 왔다. 엄마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내가 오십이 되고 육십이 되어도 밑자리를 지켜낼 줄 알았다. 엄마는 원래 그랬으니까 그래야만 했다. 이기적인 나는 내려다보기보다는 위만 쳐다봤다. 낮은 곳에서 보살펴 주는 엄마가 있다는 걸 생각지 못했다. 따뜻한 터와 습기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조차 생각이 없었다. 엄마도 비 온 뒤 손을 뻗는 공작 이끼처럼 때를 기다리는 꿈이 있었다는 것을 요즈음에야 들었다. 한국 전쟁을 겪은 세대들이 그러하듯이 궁핍을 운명처럼 안고 살았을 우리 엄마. 칠남매의 맏딸이자 육남매의 맏며느리에, 자신이 낳은 일곱 자식 사이에서 여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억척스런 일꾼으로 어미로 이겨 낼 뿐이었다. 이 땅에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그렇게 희생으로 이어져 왔을 것이지만 내 어머니이기에 더 절절히 가슴을 아리게 한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아버린 지금은 돌이킬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더욱 몸부림치게 한다. 엄마의 몸은 지금 숲과 같다.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는 그 속에는 생존의 치열함이 있다. 갑자기 생각지도 않았던 올가미에 걸려버린 노루처럼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조여 오는 암세포는 이제 온 몸과 마음을 점령했다. 운명에게 물려 처분만을 바라는 엄마가 안타깝고 가엽다. 현대의학으로나 민간요법으로도 어쩔 방법이 없어 자식인 나는 곁을 지키기만 한다. 엄마의 몸 깊은 곳에서 바람소리가 새어나온다. 한숨이 섞인다. 짧은 시간 피었다 주목받지도 못하고 사라지는 이끼 꽃처럼 애욕이 고개를 들다가 이내 사라지는 소리인가 싶다. 능 주변 십이지신상으로 걸음을 옮긴다. 엄마는 부축 없이 발을 뗄 수조차 없다. 어제의 비로 호석의 발치에 솔이끼 꽃이 폈다. 내 눈에는 삼 천년 만에 핀다는 불가의 우담바라가 핀 것 같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던가! 능에 핀 작고 여린 꽃에게 애원했다. 바닥에 딱 붙은 이끼에 몸을 낮춰 절을 하며 볼을 비볐다. 친근한 냄새가 난다. 관세음보살이 강림하시기를 빈다. 이대로 보내드리기에는 너무나 아쉬워 일 년만 더 아니 이 계절을 넘기기까지만 더 머물게 해 달라 흐느낀다. 엄마가 가만히 내 등을 쓸어준다. 엄마의 겨드랑이 밑에 손을 넣어 어깨를 감쌌다. 코끝이 울리며 다시 눈앞이 흐려진다. 부축하는 양 하며 엄마 머리에 얼굴을 묻었다. 깊은 숲 향기가 난다. 숨을 들이쉬어 폐 깊숙이 냄새를 기억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엄마가 그리워 얼마나 더 울어야할지 모르겠다. 그때마다 여기서 기억해 둔 냄새가 엄마 냄새로 되살아 날것이다. 삶이 고달파 쓰러지려 할 때마다 이 향은 나를 일으키고 안아주는 엄마의 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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