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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선 안개 속의 구상나무
  • 입상자명 : 조미자
  • 입상회차 : 13회
  • 소속 : 일반부
  • 장르 : 일반부 시·수필
계곡의 물소리에 잠이 깼다. 창가로 다가갔다. 햇살이 지평에 퍼진다. 이 정도의 날씨면 백련사를 거쳐 향적봉까지 다녀올 것 같다. 운동화 끈을 조였다. 일어서려는데 심상치 않은 먹구름이 이동해 온다. 휴가철을 피한다고 부랴부랴 표를 끊은 것이 실수였다. 떠나던 날부터 뇌성이 일고 소낙비가 퍼부었기 때문이다. 산사에서 듣는 빗방울 소리도 운치 있을 거라며 객기를 부렸던 것이다. 산의 일기는 종잡을 수 없다. 백련사까지 가는 동안 비는 팥죽 끓듯 변덕을 부렸다. 그쳤는가 싶으면 퍼붓고, 언제 그랬느냐 싶게 헤벌쭉한 하늘을 보여주기도 했다. 일찍 떠났기에 백련사에서 시계는 정오를 조금 지나 있었다. 정상까지는 약 2㎞ 남짓한 거리였다. 이정표의 화살표가 친절하게 반겼다. 그런데 웬걸, 들어오던 진입로와는 길이 사뭇 달랐다. 비탈도 가파른데다 험한 바위와 군데군데 진흙은 물기 때문에 쩍쩍 미끄러졌다. 여선생들 두엇이 더는 오르지 못하겠다고 백기를 들었다. 남직원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어떻게 할 것이냐는 눈빛이다. 예까지 와서 정상을 보지 못한다면 칼을 빼들고 휘둘러보지 못한 꼴이 아닌가. 따르기로 했다. 편편하다 싶은 능선을 지나자 바위투성이의 암벽이 첩첩이 막아선다. 앞서 간 사람들이 정으로 쫀 골을 타고 기어올랐다. 숨이 가빠왔다. 먼저 가는 동료와의 거리가 멀어졌다. 산을 타보지 않은 나는 힘이 딸리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말 것인가, 오를 것인가. 갈등이 일었다. 뒤따르는 이에게 길을 비켜 주었다. 숨 좀 돌린 후에 따르겠다고 했다. 비는 기세 좋게 쏟아지고 주위는 운무로 한 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잘못 길을 잃으면 낭패를 볼까 싶어서일까? 꾀를 부리는 나를 그들은 일행의 가운데로 밀어 넣었다. 내가 기진맥진해서 나무뿌리에 걸터앉으면 일행 모두가 등정을 멈춘다. 심호흡을 하고 일어서지만 얼마 못 버틴다. 그들의 얼굴에서 초조한 빛이 돌았다. 일기도 고르지 않은데다 남은 시간이 촉박해졌기 때문이다. 이제 나의 손은 발 이상의 효용가치를 못 냈다. 돌부리를 움켜쥐고 엉금엉금 네 발로 기는 형국에 이르렀다. 나는 바위벽에 쓰인 이정표의 수치를 크게 읽었다.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귀찮으리만치 소요시간을 물었다. 그들은 정상이 멋있더라고 전해 주었다. 밝고 여유 있는 모습이 부럽기만 했다. 나도 산을 내려올 때는 저와 같이 미소 띤 모습을 할 수 있을까. 잠시 산그늘에서 쉬는데 ‘야호’ 소리가 들려왔다. 귀가 번쩍 틔었다. 이는 정상이 멀지 않았다는 조짐이 아닌가. 나무들의 키가 줄어들고 잡목이 동산을 이루는가 싶더니 서성거리는 사람들의 무리가 시계(視界)에 와 닿는다. 최정상이었다. 운무로 휩싸인 정상은 넓은 바다에 떠있는 섬 같았다. 동료들은 제일 높은 바위에 올라서라고 손을 이끌어준다. 좀 도드라져 튀어나온 바위에 발 딛을 곳까지 마련해 준다. ‘야호’ 한 번 외쳐 보라고 권한다. 나는 “야” 하고 소리쳤다. ‘호’를 잇지 못하고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뜨거운 눈물이 안개바람 속에서 볼을 타고 흘렀다. 걷잡을 수가 없었다. 누가 볼세라 얼굴을 두 팔 사이에 감추었다. 정상까지 오르느라 눌러왔던 마음고생을 끝내 참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봉우리의 한가운데엔 두 길이나 될까 한 돌탑이 서 있다. 누군가 먼저 쌓았는지 이곳에 오른 사람들이 돌을 얹어 이룬 탑이다. 돌 한 개를 주워 얹었다. 조용히 묵상했다. 여기까지 오도록 앞에서 격려해 주고 뒤에서 끈기 있게 인내해준 사람들에게 감사드렸다. 시덥잖게 여겼던 잡목, 뭇사람들에게 밟히는 돌멩이에 의지해 오른 자신을 생각했다. 타인을 배제하고 고고하게 자신만의 성(城)을 고집한 자만과 허욕이 무너지고 있었다. 다시 못 올 것 같은 심정에 돌을 두어 개 더 쌓고 싶었다. 그러나 또 뒤에 오는 이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어야 한다. 그들의 몫은 남겨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앞에 구상나무가 서식한다는 입간판이 보였다. 몇 천 년을 살고도 아쉬워 하늘로 가지를 뻗는다는 나무였다. 그래서 구상나무는 정상에서만 뿌리를 내리는가 보다. 그러나 구상나무는 넓은 운해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어떤 형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아마도 구상나무는 시련과 고통을 마다하지 않는 인간을 닮은 나무일 것만 같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바이올린도 로키산맥 꼭대기에서 비바람에 시달려 웅크리고 자란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구상나무는 지금쯤 안개 속에서 더 높은 곳을 향하려고 돌탑처럼 아프게 팔을 올리고 있을 것이다. 엎어지고 깨어지면서도 흙을 털고 이곳, 향적봉에 오른 사람들, 그들은 이제 서서히 하산을 준비한다. 구상나무는 어쩌면 오늘 정상에 오른 사람들의 가슴속에 자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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