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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선 산이 발효하다
  • 입상자명 : 임병숙
  • 입상회차 : 13회
  • 소속 : 일반부
  • 장르 : 일반부 시·수필
친정집 대문을 들어서니 회색 기와지붕 위로 산이 보인다. 어머니의 젖무덤처럼 완만한 곡선 위로 햇살 고운 한낮에는 구름과 바람이 새살거리며 지나간다. 사방이 어둠에 잠기면 부드러운 실루엣을 걸친 달빛이 다가와 밤새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되돌아가곤 한다. 시간이 흐르는 물결에 실려 더 먼 곳으로 가건만, 산은 움직임을 정지시킨 듯 늘 같은 표정이다. 어릴 때는 가부좌를 튼 수도승처럼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침묵을 지키는 그 모습은 보이지 않고 지붕만 보였다. 시간의 빗살에 한쪽 다리가 마모된 지게를 지고 남편이 산으로 향했다. 남편의 등에 얹어질 무거운 짐을 떠올리며 뒤를 따라갔다. 산으로 들어서니 낯설지 않은 향기가 코끝으로 다가와 나의 세포 깊숙이 잠들어 있던 기억을 소리 없이 깨웠다. 며칠 전부터 ‘숲 가꾸기’를 하느라 잡목을 베어낸 모습은, 이발소에 다녀오신 젊은 시절의 아버지를 닮았다. 머리를 짧게 깎으신 아버지는 무언가를 털어낸 듯한 개운함과 알 수 없는 설렘으로 여느 날보다 활기차 보였다. 산비탈 여기저기에 쌓여 있는 통나무 무더기가 어린 시절 처마 밑에 쌓아놓았던 노적가리처럼 보였다. 해마다 봄이 오면 남편과 함께 어떤 의식을 치르듯 산을 올랐다. 밭가에서 가파르게 올라가다 보면 나물들이 말간 얼굴을 내밀었다. 고사리, 취, 사초, 잔대, 두릅, 싸한 내음이 가슴 끝까지 파고드는 도라지와 더덕이 금세 가방에 가득 찼다. 만삭의 임신부같이 불룩한 가방을 마당에 풀면 풋풋한 향기가 와르르 쏟아졌다. 그 향기는 뜨거운 물에 데치고, 햇살에 제 몸의 수분을 다 증발시켜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말린 나물은 멀리 사는 형제나 친구들에게 넉넉하게 나눠주고 남은 건 겨우내 우리 가족에게 포만감을 안겨주었다. 가을에는 밤, 다래, 싸리버섯과 영지, 능이버섯, 수줍은 새색시처럼 은은한 향기를 꼭 품고 있는 송이버섯이 우리의 함박웃음을 따라올 정도로 풍성하다. 산은 그다지 크지 않은 체구건만 어쩌면 그리 많은 것을 품고 있을까. 자식을 예닐곱 명 낳아도 마르지 않던 어머니의 젖무덤 같다. 그 젖무덤은 나의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까지, 누대부터 보물 창고를 활짝 열어놓듯 아낌없이 내주었다. 남편은 지게를 바닥에 세우고 지게 작대기로 안전하게 받쳤다. 몸매가 쪽 고르고 등껍질이 단단한 통나무를 골라 지게 위에 얹었다. 네댓 개를 얹자 지게 다리가 땅속으로 쑥 들어갔다. ‘끙’, 외마디 신음을 내고 무릎을 굽혔다가 일어서는 남편의 목덜미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그냥 오라는 남편의 만류에도 장난을 치듯 나이테가 뱅뱅 돌고 있는 통나무 하나를 질질 끌며 따라 내려왔다. “아이구 미안해서 어떻게 해. 나 때문에 괜한 고생만 하네.” 새우등처럼 구부정하신 어머니가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셨다. 몇 올 남지 않은 하얀 머리카락이 가을볕에 파열음을 안으로 삭이며 망울 속에서 쏟아지던 목화 솜 같다. 당신은 밤이면 관절 마디마디가 질러대는 신음에 하얀 밤을 보내시건만, 몹시 미안해하셨다. 어머니가 친정집에 오신 건 구 년 전, 한여름이었다. 평생 도회지에서만 살아서 들일이라곤 전혀 해 본 적도 없는 분이지만, 이내 아버지를 따라 들로 나가셨다. 당신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살과 바람에 당신의 삶이 건조되고 손끝 지문이 닮도록 일만 하셨다. 그로 말미암아 채 반년도 지나지 않아서 까맣게 그을러서 아버지보다 나이 들어 보였다. 뒷모습은 완만한 산등성이처럼 굽어졌다. 오죽하면 당신보다 늙어 보인다며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다니는 것을 꺼리셨다. 이음새가 느슨해진 뼈마디에서 신음이 새어나와도 어머니는 아프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비 오듯 땀을 쏟으며 묵묵히 김을 매셨다. 산에 몇 번 갔다 오니 마당에 통나무가 제법 많이 쌓였다. 남편과 함께 톱으로 자르니 각질 같은 하얀 톱밥이 마당에 수북이 쌓였다. 어머니가 불을 때기 편하게 남편이 무거운 도끼를 들고 가늘게 쪼갰다. 남편의 이마에서 떨어진 땀방울이 톱밥 위로 주르르 떨어졌다. 결대로 쭉쭉 갈라진 장작을 처마 밑에 가지런히 쌓으니 나락을 쌓아놓은 듯 풍성해 보였다. 금방이라도 아궁이에서 활활 타오른 불길이 어머니의 시린 어깨를 따뜻하게 데워 드릴 것만 같다. 주말마다 친정에 가면 어머니는 당신의 가슴을 넉넉하게 열어놓으셨다. 걷는 것조차 불편하실 정도로 힘들어도 우리에게 반찬 한 가지라도 더 만들어 주시려고 애를 쓰셨다. 그런 모습이 안쓰러워 반찬을 갖고 가면 무척 서운해 하셨다. 들에서 일하다 들어가면 어머니의 혀를 차는 소리가 나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어머니의 퀴퀴한 땀 냄새가 가득 담긴 보따리들이 올망졸망 따라왔다. 심지어 이웃집 일을 도와주고 받은 삯을 용돈 하라며 주시기도 하셨다. 비록 탯줄로 이어진 자식은 아니어도 바라는 것 없이 집 뒤에 있던 우물처럼 한없이 퍼주기만 하셨다. 어쩌다 한 번 시내에 나오셨을 때 좋아하시는 냉면이라도 한 그릇 사드리면 그렇게 미안해하실 수가 없었다. 헤어질 때는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은 지폐 두어 장을 꺼내서 기어코 내 손에 쥐어주고 가셨다. 사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덩치 큰 집에는 자그마한 체구의 어머니만 남았다. 말똥구리가 돌돌 굴린 배설물처럼 작아진 어머니 혼자 계시니 헐거운 틀 속에 들어앉은 모양새다. 친정집은 낡고 외풍도 심해서 한겨울에는 마스크를 쓰고 주무실 정도로 불편한 게 한둘이 아니다. 편하게 지내실 곳을 마련해 드리겠다고 하니 그냥 있겠다고 하셨다. 당신이 떠나면 우리들이 찾아갈 고향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당신 몸속 내장이 흐들흐들해질 때까지 베풀기만 하셨듯이 산도 한없이 베풀기만 했다. 문득, 나물 한 포기 버섯 한 송이, 장작개비가 된 나무 한 그루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밖으로 밀어 올리기 위해 온몸으로 비바람을 견디며 수액과 훈김을 안으로 삭이는 인고의 시간을 보냈으리라. 당신 몸은 돌보지 않아서 온 몸이 삐걱거리듯이 산도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내색은 하지 않고 산은 언제나 베풀기만 했다. 한없이 베풀고 또 베푸는 산이 힘겹게 밀어 올리는 내밀한 언어가 귓가에 들린다. 비우는 것에 인색하지 말고 비우면 또다시 채워지는 게 삶이라고 한다. 또한 비우고 덜어낼수록 빈자리의 여운이 길게 남는다고 속삭인다. 그 속삭임이 침전물이 많아서 탁해진 나의 그곳을 맑게 정화해준다.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대문을 나서다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세상을 향해 울린 고고성을 들었을 산이 전보다 더 커져서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다. 뒤뜰 장독대의 장이 해를 묵히며 발효가 돼서 깊은 맛을 내듯이, 산도 발효한 걸까. 늘 그 자리에 있는 모습이 답답해 보였는데 어머니의 자궁 속처럼 참으로 아늑하다. 산이 어머니의 모습으로 발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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