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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선 소통
  • 입상자명 : 정애선
  • 입상회차 : 12회
  • 소속 : 일반부
  • 장르 : 일반부 시·수필
구름 한 점 없는 쪽빛 하늘이다. 산새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그윽한 꽃향내가 코끝에 스민다. 해님이 쉬어가는 나무 그늘에 나란히 드러눕는다. 식구들의 고른 숨소리에 세상을 가진 듯 뭉클하다. 지난 시간이 꿈이었나 싶다.
가출, 그런 말과 하등 상관이 없을 줄 알았다. 바람결에 스쳐 지나가는 낱말이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생경스럽던 그것이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집안을 점령했다. 예리한 흉기가 되어 오장육부를 휘저었다. 지옥불이 그보다 더 하랴. 딸아이와 티끌만큼의 가능성이 있는 곳이라면 밤낮으로 찾아다녔다. 토네이도에 휘말려 간 것처럼 어디에도 없었으며 친구들은 모른다는 말 일색이었다. 딸의 소식을 알 길이 없어 살아 있어도 사는게 아니었다.
무늬만 가졌을 뿐 준비되지 않은 부모가 우리 부부였다. 세상물정에도 어두웠다. 건축업을 하는 지인의 솔깃한 말에 형편에도 버거운 집을 지었다. 물욕에 눈이 멀어 아이들이 한창 공부에 몰두해야 할 시기이건만 학군을 옮겨 이사를 했던 것이다. 한 걸음씩 지금의 길에 오른 남편은 여간해서는 자식들이 탐탁지 않았다. 칭찬에는 인색하고 잘못한 일은 들추어내 크게 꾸짖었다.
딸아이가 잘한다고 믿고 있었던 것들은 이곳 아이들은 하나같이 저 만큼은 할 줄을 알았고, 선행학습을 한 급우들이 수두룩했다. 둘째는 점점 말이 없어지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무턱대고 몇 개월이면 예전처럼 제 자리를 잡을거라고 믿었다. 기말 시험 성적 결과가 나온 며칠 후 아이는 과외수업도 가지도 않고 귀가가 늦었다. 나는 다그치며 힐난하고 남편은 체벌로 매를 들었다. 걱정과 협박이 뒤섞인 고함이 골목을 어지럽혔다. 나의 시선을 외면하던 둘째는 여름방학을 하루 앞두고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새 학기를 시작하자마자 담임선생님에게서 딸아이가 폭행에 연루되었다는 전화가 왔다. 미궁 속 딸아이의 소식이 반가웠으나 이내 앞이 캄캄했다. 그제야 전학을 온 후 아이가 처했던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성정이 거친 급우가 외곽지에서 왔다고 걸핏하면 놀렸으며, 너 때문에 반 평균이 내려갔다고 인신공격을 일삼았다. 사건은 친구 두명과 함께 거친 급우를 학교 부근의 공원에서 만나면서 일어났다.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했더니 거친 급우가 막말과 욕설을 퍼부었고, 화가 난 딸이 뺨을 때린 것이 그만 안경이 땅에 떨어져 알이 깨어진 것이다. 교내 폭력법상으로 살인미수법이 된 가해자와 조속한 합의가 필요했다. 친구들 입장이 난처해지자 꼭꼭 숨었던 아이가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말로 다 할수 없을 정도로 곤혹스러운 일이었지만, 딸 아이가 우리 곁으로 돌아온 계기였으니 불행 중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집을 나간 처음에는 친구들 집을 오갔으나 나중 보름동안 기거한 방이 있었다. 출입구부터 곡예를 하듯 올라가 이층 구석진 곳의 방문을 열었다. 숨미 턱턱 막혔다. 코가 아프고 눈이 아려왔다. 곰팡이 냄새가 진동하는 좁은 방에서 사람이 지냈다는게 믿어지지 않았다. 안간힘을 쓰며 여기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던 딸의 마음이 아팠다. 방안에 주저앉아 딸아이를 끌어안고 참고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부모의 얼토당토 않은 욕심이 화를 불렀으며 모든게 이 어미 탓이었다. 새로운 학교생활이 어떠냐는 물음에 괜찮다고 답하는 말을 그대로 믿은 채 아이의 어려움을 헤아리지 못한 내 죄가 컸다. 이사를 한 집에 문제가 불거져 신경을 쓰느라 어미 노릇을 세심하게 못했던 것이다.
방황을 하던 딸아이가 집으로 돌아왔지만 불안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 잠자는 아이를 학인하고 다시 잠을 청하기가 다반사였다. 무엇보다도 가족간에 소통이 절실했다. 뼈아픈 고통을 경험한 모두가 시간을 공유할 만한 거리르 수소문하기로 뜻을 모았다. 특별한 재주를 갖추지 않아도 다 같이 할 수 있는게 무엇이 있을까.
쉬는 날마다 산에 오르는 다섯 마음이 서서히 변해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자연스레 어깨를 휘감고 손도 맞잡았다.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서로 닦아주고, 소망을 담아 돌탑도 쌓았다. 산길에서 만난 달개비, 솔체, 병아리 풀꽃들이 방긋이 미소 지으면 걸음을 멈추고 곁에 옹그려 앉아, 앙증맞은 고것들의 눈과 귀와 코가 어디에 있나 살피다가 따라 웃었다. 산을 오르는 횟수가 늘어가자 둘째는 어둠의 껍질을 벗기 시작했다. 속내를 조금씩 드러내는가 싶더니 한결 표정이 환해졌다.
멀리서 보면 드높고 우뚝한 산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산은 살갑고 정답다. 풀숲 사이로 졸졸거리는 작은 도랑물, 새들의 속삭임, 층층 돌계단, 울퉁불퉁하고 좁다란 흙길, 사람들의 발자국소리 어는 것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다. 피톤치드를 뿜어내는 상쾌한 길에 서면 기운이 불끈 솟는 것 같았다. 비온 뒤의 산 냄새는 또 어떠한가. 흠뻑 물을 머금은 흙과 풋풋한 나뭇잎이 어우러진 길을 걷노라면 우리의 대화는 끝을 몰랐다. 아이들은 어릴 때 맨발로 뛰어다니던 기억을 떠올리고 미래에 대한 꿈을 꾸기도 했다. 산으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소통을 하는 눈빛들은 하늘처럼 말갰다. 견디기 힘든데도 불구하고 딸아이가 우리 앞에 속마음을 내보이지 못한 것은 대화부족이 문제였다. 서로 간에 소통이 되지 못한 결과였던 것이다.
숲속을 거닐면서 세상사를 읽는다. 자식을 부모의 잣대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독립된 하나의 존재로 인정했어야 옳았다. 부모는 자식에게 세상을 살아갈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에서야 우리 부부는 철이 드는가보다. 한 그루의 나무가 모여 서로 의지하고 벗하며 푸른 숲을 이루는 것처럼, 가족으로 만난 인연을 소중히 여겨 단란한 가정을 꾸리기로 마음을 다 잡았다.
산은 세파에 시달린 사람들을 품어주는 안식처이다. 늘 그 자리에서 아픈 상처를 치유해주고 넉넉한 여유까지 말없이 안겨준다. 수많은 이들이 사계절 끊임없이 산을 찾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능선과 계곡을 오르내리며 온갖 생명들의 쉼 없는 합창을 들었다. 나 또한 이 경이로운 자연의 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사방에 펼쳐진 녹색 숲을 바라보는 눈이 더 없이 편안하다. 높고 깊은 산처럼 너그러워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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