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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나는 그래서 숲을 닮았다
  • 입상자명 : 오 제 훈 경기 김포 김포고 2-10
  • 입상회차 : 6회
  • 소속 : 청소년부
  • 장르 : 청소년부 글쓰기

“너는 참 너희 아버지와 그렇게 많이 닮았냐?” 요즘 주위 어른들로부터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 주위에서 그런 소리를 들으면 ‘왜 내가 그런 말을 들을까.’라는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아버지와 내가 많이 닮긴 했지.’라는 생각도 든다. 어찌 보면 나는 아버지와 참 많이 닮았다. 그리 크지 않은 키도 그렇고, 얼굴에 난 수염이며, 곱슬머리 그리고 국어선생님이신 아버지의 말투까지 난 정말 아버지와 많이 닮았다. 반면에 이런 우리 부자지간에도 다른 것이 있다. 바로 태어난 곳이 다르다는 것이다. 나는 김포공항이 있는 공항동에서 태어나 7살이 되던 해까지 거기서 살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셨다. 나는 어린 시절 비행기 소리를 자장가로 삼고, 달리는 자동차를 장난감으로 삼으며, 빌딩 숲에서 자랐다. 아침에 일어나 유치원에 다녀오면 집에 거의 틀어박혀 있었다. 그저 창문 밖을 이따금 바라보았다. 작은 공터도 없어서 마음껏 뛰지도 못했고, 차 조심하라는 소리만 귀에 딱지가 지도록 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쾨쾨한 매연을 마시고, 뿌연 세상을 보면서 온 세상이 그런 줄만 알았다. 나와는 반대로 아버지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농사일을 도우며 사셨다. 푸른 숲을 벽으로 삼고, 파란 하늘을 지붕으로 삼아 그 커다란 자연의 집에서 뛰노셨다. 차 조심하라는 소리를 들을 필요도 없었고, 밖은 위험하니까 일찍 들어오라는 소리를 들을 필요도 없었다. 맑은 공기와 푸르게 우거진 숲이 아버지와 늘 함께 하였다. 참으로 부자지간에 닮은 면도 있지만 다른 면도 가지고 있었다.

나와 다른 삶을 사셨던 아버지는 내가 도시에서 젖어 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보다. 그래서 나는 주말이 되면 정말 수도 없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신 춘천에 가곤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 댁에 가면 TV 앞에만 있었다. 도시에 젖어 있던 나에게 시골 생활은 낯설고 어려웠다. 주위 풍경 때문은 아닌데 왠지 거부감이 느껴졌다. 그런 나를 아버지는 매번 밖으로 끌고 나가셨다. 푸름에 싸인 밭과 논으로 끌려갔다. 개울가에는 발이 살짝 닿기만 해도 얼어버릴 듯한 시원한 물이 흐르고 있었고, 주변은 온통 나지막한 산과 푸른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런데도 내 가슴은 설레지 않았다. 제비나비가 날아다니고, 분홍의 진달래가 피어도, 푸른 수박이 익어갈 때도, 코스모스가 한들한들 인사할 때도 나는 가슴이 뛰지 않았다. 나는 정말로 도시에 푹 젖어 있었다. 빨리 돌아가서 친구들과 놀고 싶은 기분뿐이었다. 그러던 중 자연에 대한 깊은 울림이 마음으로 와 닿게 된 적이 있었다.

어릴 적 벌초하는데 끌려갔었을 때, 어른들 품에서 어린 나는 정말 재미없었다. 속으로 ‘이렇게 꾸불꾸불한 산길로 나를 왜 끌고 가는 거야.’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날카로운 풀잎에 다리가 스쳐서 피가 나기 시작했다. 오기 싫었던 곳에서 괜히 피만 봤으니 슬펐다. 그리곤 굵은 눈물이 한두 방울씩 떨어지고, 그때 아버지께서 나를 업으셨다. 선산에 흩어져 있던 묘마다 이동하면서, 벌초를 끝내고 산 아래로 내려가는 내내 나는 아버지 등에 업혀 있었다. 그러면서 꼭 산등에 엎드려 있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한참 아버지 등에 업혀 있는 동안 아버지에게선 흙냄새가 느껴졌다. 땀과 범벅이 된 비릿한 흙냄새. 산 아래로 내려가는 내내 업혀 있었다. 이따금 끈끈한 거미줄이 얼굴에 와 닿을 때도 아버지의 등이 싫지 않았다. 아버지는 주위의 작은 꽃이며 나무, 풀벌레까지 하나하나 나에게 말해 주시며 숲의 맛을 느끼게 해주셨다. 삽사리, 등에, 애기똥풀, 상수리나무 그리고 싸리나무 같은 이름이 내 기억에서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던 것은 푸릇한 숲내와 아버지의 체취가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숲 내음을 알게 되면서 시골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졌다. 그때는 아마 한창 바쁜 계절인 여름이었을 것이다. 들판은 알록달록 꽃단장하기에 바빴고, 시골 사람들은 수확하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파란 산 아래로 옥수수와 고추가 크고 있었고, 감자는 몸을 땅속으로 더 숨기고 있었다. 옥수수를 따면서 옥수숫대를 조금씩 잘라 씹어먹어 보았다. 생긴 것은 옥수숫대이건만 맛은 사탕이었다. 옥수숫대를 한창 씹으며 감자를 캐고, 고추를 땄다. 고추에 검붉은 고추장, 상추와 밥으로 소박한 점심을 먹었다. 바쁘고 더운 여름을 잠시 피해 보려고 족대 하나와 어항, 된장을 가지고 개울에 갔다. 동생에게 풀 주변을 밟으라고 했다. “매번 왜 허탕이지.” 아쉬웠지만 그래도 어항 하나만 믿고 있었다. 어항에 된장을 바르고 물살이 적당한 곳에 둔다. 한 30분쯤 지났을까 조심스레 들어보았다. “아싸!” 저녁거리가 한 통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우리들만의 간식은 따로 있었다. 바로 가재이다! 조그만 건 살려주고 큰 놈만 잡는다. 저녁은 매운탕으로 하고, 다시 나와 뛰어놀았다. 숲과 개울에서 지내다보면 여름도 가고 있었다. 여름이 지나가면 밤이나 잣도 있고, 산에서 보는 머루와 달래, 빨간 산딸기가 있는 계절. 짧지만 행복한 가을이 찾아온다. 그리고 짧은 가을이 가면 겨울이 그 뒤를 따라온다. 가을처럼 먹을 것은 없지만 여름 때 먹은 옥수숫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군고구마가 우리와 겨울을 난다. 아무 것도 없는 논, 밭은 운동장이 되어준다.

금년 6월, 30년 전과 변함없는 숲 사이 흙길에 아버지와 나란히 서 보았다. 온 세상의 파란 것이 다 모인 하늘과 밤중을 달리는 듯한 고요함이 있었다. 이따금 꿩 우는 소리만 아른거렸다. 아버지는 나지막이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개울가에서 가재 잡았던 일, 옥수숫대를 씹어 먹던 일 등 여러 이야기를 해주셨다. 왠지 모르게 그 이야기에 매료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내가 이곳에서 경험했던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이런 분위기에 제격이라며 시조 한 편을 읊어 주셨다.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겻셰라 / 아희야 무릉이 어듸오 나는 옌가 하노라.”

“유유자적(悠悠自適)”

듣다보니 이런 한 마디가 생각났다. 아버지의 어릴 적 이야기와 시조를 곱씹어 보면서 시원한 바람과 고요함을 온몸으로 맞아보았다. 숲내를 느끼면서 아버지처럼 어릴 때를 생각해 보았다. 어릴 적, 공항동에 살 때 항상 집에만 있어서 말동무가 없던 나에게 숲은 낯선 곳이었지만 좋은 친구였다. 친구들이 놀린다고 투정을 부려도 숲은 그것을 끝까지 받아주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숲은 도시에 익숙한 나 말고도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안아주고 있었다. 작은 풀꽃데기부터 한 아름보다 더 굵은 나무까지 숲은 받아들였다. 나에게 숲은 ‘받아들이는 법’을 가르쳐준 좋은 친구였다.

포용하는 삶! 아버지는 내가 숲에서 그런 걸 배우기를 바라신 것 같았다. 그 덕분에 이제 나는 숲에게 투정을 부리지 않는다. 넓고 넓은 아버지와 숲처럼 나도 한없이 크게 살고자 한다. 그 날도 숲과 함께 서서 가을 산처럼 붉어진 하늘을 바라본다. 숲도 나도 빨간 하늘을 보며 초록빛이 더욱 빛남을 느꼈다. 나와 닮은 아버지가 초록빛을 지닌 것처럼 내 안의 초록빛도 점점 선명해져 갔다. 숲을 닮은 아버지. 아버지를 닮은 나. 이제 나는 아버지 말고도 누군가 하나를 더 닮았다. 숲이다. 그렇다. 나는 그래서 숲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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