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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선 산은 나와 함께 걷는다
  • 입상자명 : 이 보 윤
  • 입상회차 : 8회
  • 소속 : 청소년부
  • 장르 : 청소년부 글쓰기

'산넘어 산이다.’ 가면 갈수록 고생만 더할 때 흔히 쓰는 말이다. 지금의 나는 아니라하고
싶지만,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산이 큰 덩치로 우리를 가로 막으면 절대 넘을 수 없고, 널따란 어깨로 우리를 둘러싸면 결코 돌아갈 수 없으니까….
이렇듯 사람들의 ‘산은 고생길’이라는 인식으로, 산은 정말 ‘장애물’과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산은, 사람들로부터 깎이고 벗겨져서 장애물 대신 그들에게 유용한 도로, 고층 건물의 터가 되어야 했다. 산이 갓 피운 애기똥풀도, 수많은 세월 동안 길러온 너도밤나무도, 아끼고 귀여워했던 동충하초도 산과 함께 내버려지게 되었다.
산은 이제 큰 덩치로 가로 막지도 않고, 널따란 어깨로 둘러싸지도 않는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풀과 나무가 무성한 자연의 산보다 헐벗고 깎인 산을 더 자주 찾는다. 그리고 그 산을 더 이상 ‘산’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들에겐 이제 ‘장애물’이 아니기 때문에….
하지만 아니다. 산은 절대로 장애물이 아니다. 장애물을 만드는 것은 인간들 스스로이고, 산은 오히려 인간들에게 ‘진짜 장애물’을 뛰어넘도록 가르쳐준다.
“얘들아, 나 높은 산에 가.”
“높은 산? 나도 가봤는데 거기 진짜 힘들어. 숨 막히고 죽을 것 같아.”
“거기 땀 엄청 많이 나. 난 다신 거기 가기 싫어.”
9살. 높은 산은 처음이었다. 산이 싫다는 친구들의 말에 나도 산에 가는 것이 싫었다. 그리고 억지로 간 그 높은 산은 친구들의 말대로 힘들고, 숨막히고, 죽을 것 같고, 엄청 땀이 나는 곳이었다. 높디 높은 대둔산의 선입견 섞인 첫인상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엄마, 힘들어 죽겠어. 나 못 올라가겠어.”
“이제 중간도 안 왔는데 벌써 힘들다고 하면 어떻게 해. 다른 산 가봤잖아. 좀 높을 뿐이지 괜찮아.”
“무서워. 돌도 이렇게 많고 바람도 불고. 올라가다 떨어지면 어떡해?”
“겁 먹지 마. 엄마랑 손 잡고 가면 괜찮아. 응?”
난 엄마 손을 잡고 중턱을 올랐다. 유난히 바위가 많은 산이었기에 아이들이 많이 넘어지고 다쳤다. 겁도 나고, 다리도 후들거려서 눈물이 똑똑 떨어졌지만, 벌레들 보는 것에 억지로 만족하면서(어릴 적부터 벌레를 좋아했다.) 바위산을 조금씩 넘어갔다. 정상 고지에 오르기 전, 옆길의 내리막이 가파르고, 큰 나무들의 길게 뻗은 가지가 내 얼굴을 스치던 곳을 지날 때, 갑작스런 비가 내렸다. 예상치도 못했던 엄청난 폭우에 주르륵 참던 눈물이 나왔다.
“엄마, 무서워. 비 너무 많이 오잖아. 집에 가, 엄마.”
“거의 다 왔어. 소나기니까 금방 그칠거야. 잠깐 힘들고 금방 괜찮아져.”
엄마가 미웠다. 딸이 이렇게 힘들다면서 우는데 자꾸 괜찮다고만 하고…. 그 상황에서도 아빠한테 찰싹 달라붙어 눈물도 안 흘리고 ‘언니가 왜 울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말똥말똥 쳐다보던 동생도 미웠다. 화 섞인 뜨거운 눈물이 빗줄기 내리듯 계속 흘렀다.
“아야. 으앙.”
동생이 넘어졌다. 바위 끝에 무릎을 긁혀 피가 많이 났다. 빗물로 살에 달라붙은 바지가 핏물로 젖어갔고, 그것을 본 동생은 정말 산이 떠나갈 것처럼 울었다. 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나는 아슬아슬한 낭떠러지 앞에 주저앉아 버렸다. 몸이 기우뚱했지만 단풍나무 가는 가지를 잡고 몸을 지탱했다. 다시 일어나 한 발자국 내디뎠을 때, 물기 있는 바위 위에서 미끄러졌지만 바위틈의 이름 모를 풀을 잡고 일어날 수 있었다. 나뭇가지에 찔리고 바위에 긁혀 손에 피가 났지만 죽는 줄 알았던 내 몸뚱어리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것을 보고 왠지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엄마, 아빠가 우는 동생을 달래고 상처를 봐주는 동안, 난 뭔지 모를 이상한 희망 같은 것을 느꼈고 혼자 그 바위산을 타기 시작했다.
“보윤아, 어딨어?”
“엄마, 나 여기있어. 올라갔어.”
“비 와서 위험하니까 같이 가.”
“나 혼자 갈 수 있을 것 같아. 천천히 갈게.”
난 동생이 울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계속 올라갔다. 큰 나무들이 내미는 손을 잡고, 바위들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 열심히 걸었다.
“정상이다!”
힘들게 오른 정상은 천국 같았다. 똑똑똑똑…. 비가 그치고 잎 뒤에 숨어 있던 칠성무당벌레가 빗물을 털고 날아갔다. 엷은 흰구름이 살짝 낀 대둔산의 봉우리에서 난 그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다시 내려와 출구쯤에서 마지막으로 잡았던 층층나무 가지를 놓아주고 길고 길었던 대둔산 여정을 마쳤다. 산은 인사를 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가만히 서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만의 착각이 아니었다면 그때의 산은 내게 오랜만에 찾았던 절친한 친구 같은 느낌을 주었다.
높은 산은 넘기 힘든 존재가 아니라 내가 고비를 넘을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은인이었다. 자신의 몸을 내어주면서까지 날 위기에서 꺼내준 단풍나무, 바위틈 작은 풀. 그것은 일시적인 도움이 아니었다. 내가 살아온 17년의 인생에서 그때의 기억은 내게 좌절이 올 때마다 극복의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나의 은인은 내 마음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 혼자 넘는 길이 아니야. 네가 필요한 곳에 어디든 너와 함께 걷는 것이 있어. 그리고 그것은 그 다음 길에서 스스로 걷게 해줄거야.’
사람들에게 푸른 산은 여전히 장애물이다. 그들은 지칠 때마다 ‘산 넘어 산’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니다. 산은 절대로 장애물이 아니다. 산은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한평생, 내가 산과 만나는 곳에서, 산은 나의 옆에서 묵묵히 걸어줄 친구이다. 그리고 내가 다음 고난을 이겨낼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희망의 손을 흔들어 줄 스승이다.
산은 나와 함께 걷는다. 이 걸음이야말로 어리석은 인간이 산과 나눌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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