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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선 눈 뜬 장님
  • 입상자명 : 최 호 진
  • 입상회차 : 8회
  • 소속 : 청소년부
  • 장르 : 청소년부 글쓰기

이제는 적응도 될 만하지만 매번 나를 괴롭히는 것은 시험 스트레스다. 밤늦게까지 책상 앞에 앉아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는 공식을 외우고, 하기 싫은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고문이다. 그래도 시험기간이 많이 남아 있을 때는 견딜 만하다. 하지만 시험보기 일 주일 전부터는 사정이 달라진다. 이유 없이 머리가 아프고 눈이 빠질 것 같은 스트레스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그 때부터는 책상만 봐도 머리가 아프다. 이것은 성적에 대한 부담감, 내 스스로 나에게 내린 족쇄다. 아니다. 내가 채운 것이 아니라 그 누군가 나에게 채운 것이다. 이런 억울한 생각이 들 때면 내 머리는 또 다시 지끈지끈거린다. 그 날도 그랬다.
나는 암기과목을 다 끝내지 못한 압박감 때문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무 것도 알 리 없는 동생이 눈앞에서 알짱댔다.
“야! 너 지금 내가 공부하는 거 안 보여? 내가 시험 못 보면 네가 책임질 거야?”
나도 모르게 삿대질과 함께 큰 소리가 튀어 나왔다. 동생은 당황했는지 울음을 터뜨렸다.
유난히 키가 작아 아직도 유치원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동생이 몸만큼이나 마음도 여리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다.
“우리 바람 좀 쐬고 올까?”
아버지께서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 듯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가까운 곳으로 드라이브를 가자고 하셨다. 우리를 안내한 곳은 산인지 길인지 모를 곳이었다. 차창 밖으로 시원하게 뚫린 4차로가 보였다. 우리가 달리는 곳은 그 곳이 아니라 그 옆 구불구불한 오솔길이었다. 너릿재는 속력을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길은 포장돼 있지만 깊은 산길처럼 구불구불하기 때문이다. 집 가까운 곳에 이렇게 좋은 곳이 있었는지 처음 알게 되었다.
어머니와 나는 차에서 내려 산길을 걸었다. 길옆으로는 무성한 나무들이 어깨를 켜켜이 끼고서 자신들의 발밑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겠다는 듯 뭉쳐 있었다. 푸른 꽁지를 달고 새 한 마리가 나무 위로 날아올랐다. 하릴없이 걷는 우리 뒤로 서너 명의 마라토너들이 달려왔다. 모두 구슬땀을 흘리면서 앞만 보며 뛰어가고 있었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더위를 식혀주려는 듯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 사이로 솔바람이 불어왔다. 등 뒤로 흐르던 땀이 금세 사라져버렸다.
매미가 시끄럽게 울고 있었다. 집 담장 밖에서 들리던 매미소리는 시끄러울 뿐이었다. 시도 때도 구분할 줄 모르는 무법자 같던 매미도 너릿재에서는 오케스트라의 한 멤버로서 하모니를 이룬다고 생각했다. 자잘한 풀벌레소리에 섞여 한꺼번에 왕왕 울어대 차라리 시원했다. 어쩌면 담장너머 매미가 나를 따라와 나처럼 스트레스를 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산길은 꼭 엄마가 자란 시골 고샅길을 지나는 것 같구나.”
산속 풍경에 반하신 듯 엄마의 걸음은 느렸다.
“엄마, 그렇게 좋으세요? 시골길도 이랬어요?”
“이맘때면 능소화도 늘어지고 봉숭아도 지천이지. 이렇게 솔향기도 나고 말야.”
엄마는 숨을 크게 들이켜시며 이야기했다. 산길 정취에 흠뻑 빠지신 것 같다. 나는 집에서 차로 20분 거리도 되지 않는 곳에 이렇게 소박한 시골길이 있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가까운 산은 모두 아파트로 개발되었거나 있다 하더라도 사람이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치 동네 산책 나오듯 이렇게 거닐 수 있는 너릿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마와 나는 숨구멍을 찾은 것 같다. 사실 말씀은 안 하시지만 엄마께서도 하루 종일 전화부스에 앉아 상냥한 목소리로 전화상담을 해야 하는 것이 무척 힘이 드실 것이다.
“호로롱… 쩍쩍.” 매미 울음소리가 끊겨 조용해진 산에 새소리가 들렸다. 평소 이어폰을 끼고 살아 미세한 소리는 잘 듣지 못하는 내 귀에 산새소리가 또박또박 들려왔다. 분명 새소리가 이렇게 들린다는 것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믿지 않을 것이다. 산에 와서 새로운 세상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산에서는 새로운 세상을 찾을 수 있다. 자동차 사이렌과 공사장 소음, 매연과 공장폐수로 찌든 도시를 품어 안은 산의 풍경은 달랐다. 비록 산허리는 동강나 4차선이 뚫렸지만 뼈가 드러난 허리 주변에는 오래된 나무와 풀이 상처를 보듬고 무성해져 있었다. 그것이 좋았다.
나는 눈 뜬 장님이었다. 우리 모두는 자연을 버렸고 과학기술에 갇혔다. 그리고 그 때문에 아프다. 몸 전체를 깎이고도 부지런히 일어나 숲을 가꾸는 자연만도 못하다. 그것에 친하지도 않다. 단 한 번 왔을 뿐인데 내게 먼저 온 마음을 열어준 너릿재 풀 한 포기 매미 한 마리만도 못하다. 내 머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하게 나았다.
“엄마, 우리 다음에 여기 또 와요.”
우리는 마치 무슨 비밀이라도 생긴 듯, 아지트라도 발견한 듯 흐뭇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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