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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늙은 밤나무 이야기
  • 입상자명 : 김성옥
  • 입상회차 : 16회
  • 소속 : 일반부
  • 장르 : 일반부 시·수필
나는 밤나무입니다. 이 땅에 뿌리내린 지 이천 년이 넘었고 시조는 참나무 할아버지입니다. 떡갈나무, 굴참나무, 상수리나무와 사촌지간인 셈입니다. 외모가 엇비슷한 탓인지 어떤 이들은 저를 참나무라 부르더군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은근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도토리나 상수리 열매를 감히 알밤과 착각하다니요? 입이 건 상수리 댁 말마따나 도토리를 상수리라, 상수리를 도토리라 우기는 청맹과니들입니다. 쓰고 있는 모자만 봐도 이 둘의 차이를 금세 알 수 있거든요. 하긴, 사람들은 내가 수꽃과 암꽃을 피운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합니다. 관심이란 애정의 또 다른 이름, 심미안이란 게 별 게 아니거든요.
아 그러고 보니 너무 제 말만 늘어놓았나 봅니다. 말이 많아지면 나이가 드는 징조라는데, 외로우면 말이 많아지는 법이라던데. 아마 저는 한 바가지의 관심이 절실한지도 모르겠어요.
어느 핸가, ‘매미’라는 태풍이 다녀가기 전까지 제게도 가족이 있었지요. 그때 젊은 나무들이 참 많이 세상을 등졌습니다. 제 딸도 그때 죽었지요. 손님처럼 꽃이 오고, 밤송이가 젖멍울처럼 부풀 때 딸에게서도 제법 밤나무 태가 났었지요. 모녀가 마주보고 햇볕을 쬐거나 바람을 듣고 비를 타며 한마음으로 아람을 기다렸답니다. 그런 아이가 뿌리째 나동그라지는 걸 보면서도 아무 것도 해 줄 수가 없었지요. 아이를 가슴에 묻은 뒤 눕고 싶은 날이 많아졌습니다.
그래도 저는 이곳이 좋습니다. 어머니의 젖무덤 같은 능선이 나무와 풀과 꽃들을 붙안고 살아가는, 요람처럼 평온한 곳이거든요. 밤하늘 이정표로 서있던 별들이 꾸벅꾸벅 조는 새벽녘, 배드민턴 동호회 사람들이 공원으로 들어섭니다. 공에 가속이 붙으면서 미명의 하늘이 터질 듯 부풀고 이내 말간 해를 순산합니다. 갓 부화한 햇살이 기지개를 켜는 이 시간을 저는 사랑합니다. 이때만큼은 옹이가 많은 제 몸도 푸르게 부풀어 오르거든요. 아, 이제 광합성을 할 시간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한 무리의 조무래기들이 소풍을 나왔습니다. 눈망울이 상수리를 닮은 아이들, 숲은 잠시 아이들의 놀이터가 됩니다. 나무에 기어오르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개미굴에 코를 박고 있는 아이, 들꽃 하나하나를 어루만지며 말을 거는 예쁜이도 눈에 띕니다. 그때 다람쥐처럼 뛰놀던 아이 몇이 제게로 오더군요. “선생님, 이 나무에 꽃이 피었어요. 이 나무 이름이 뭐예요?” 관심이 고마운 저, 아이들 눈높이에 맞게 슬며시 팔을 내려줍니다. 그때 한 아이가 마치 대단한 보물을 발견한 듯 소리를 칩니다. “앗~! 꽃 아래에 또 꽃이 있어요. 별처럼 생겼어요.” 순간 저는 너무도 놀라 그만 소리를 지를 뻔했습니다. 사람들에겐 들리지 않지만 우리 나무에게도 고유의 언어가 있거든요. “응, 이건 밤나무의 암꽃이란다. 수꽃의 아래에 피지. 꽃에 암술과 수술이 있는 것처럼 나무도 암꽃과 수꽃이 있어. 나무들은 주로 바람을 이용해 번식을 하지.” “그럼 나무한테는 바람이 중매쟁이겠네요?” 아이들이 까르르 웃습니다. 빗방울이 듣는 듯합니다. 뉘 집 자식인지 거 참 영특하지요?
웃음소리를 여운처럼 남기고 아이들은 유치원으로 돌아갑니다. 바람도 피서를 떠났는지 공원은 한 폭의 정물처럼 조용합니다. 사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은 햇살이 길게 늘어지는 오후 무렵입니다. 밤새 정자에서 술추렴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잠을 설친 소나무 영감님이, 지하층층 물을 길어 가지로, 잎맥으로 나르던 상수리 댁과 굴참나무 댁이 오수에 드는 시간. 자꾸만 목이 길어집니다. 바로 그네들이 올 시간이거든요.
오늘도 그네들은 수다거리를 한 보따리나 꾸려 왔군요. 아무개 할머니와 모 영감님의 로맨스가 오늘의 화두입니다. 화자의 입담이 워낙 차지기도 하려니와 이런 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물리지가 않습니다. 공처럼 통통 틔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좋지만 생의 굽이굽이를 에돌아 온 그네들의 이야기엔 희로애락이 다 들어있습니다. 제가 자신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때론 성도 낸다는 걸 알면 그네들의 반응이 어떠할까요? 겉으론 늘 쾌활한 척하지만 나름의 사연 주머니를 하나씩 간직하고 있는 그네들. 제가 해 줄 있는 거라곤 가만 바람을 모아 손 부채질을 해주는 것밖에요.
그네들은 연둣빛 펜스를 두른 5층 건물에 삽니다. 그곳이 오갈 데 없는 노인들의 집이란 걸 저도 얼마 전에야 알았어요. 그러니까 공원을 사이에 두고 유치원과 양로원이 마주하고 선 셈이지요. 그들을 통해 저는 생의 들머리와 저물녘을 봅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꽤 오래 산 듯합니다.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해 제 나이조차 잊은 걸요.
다람쥐 눈을 피해 용케 싹을 틔운 이래 애오라지 하늘바라기하며 살아온 생애입니다. 봄이면 아랫도리에 불끈, 힘을 실어 사명처럼 물을 길어 올렸어요. 위로, 위로 물관 따라 오르는 길은 고됐지만 ‘끙’하고 힘을 줄 때마다 튀밥처럼 터지는 꽃숭어리들. 그저 물만 주었는데도 멀고 좁은 산도(産道) 지나 촘촘히 초록별로 뜬, 실한 밤송이들이 하늘을 가릴 정도였으니까요. 이제는 모두 지나간 일이라는 것을 압니다. 조금씩 기력이 쇠하면서 해거리가 왔다는 것도, 비바람이 조금만 거세도 툭툭 관절이 부러져 날로 옹이가 늘어나는 것을, 사람들이 왜 저를 참나무로 착각하는지도, 밤나무 아래 길다란 나무의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더러 서글플 때도 있지만 아직은 괜찮습니다. 전성기만큼은 아니지만 아직은 저를 찾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연둣빛 펜스를 두른 건물 안 사람들은 저처럼 일찍 일어나고 제가 물을 길어 올릴 무렵 식사를 하고, 햇살이 하품을 할 무렵 낮잠에 듭니다. 틈틈이 트로트가수가, 에어로빅 강사가 사회복지사도 다녀갑니다. 그때만큼은 행복해 보이지만 나는 그 시간대의 얼굴이 페르소나라는 것을 압니다. 외롭거나 이야기가 많은 노인들은 원래 수다가 많은 법입니다. 옹이가 많은 제 생애와도 참 많이 닮았습니다. 나무의 한살이나 사람의 생애나 매한가지라고 바람이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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