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프린트하기
대상 계곡의 나이
  • 입상자명 : 박성은
  • 입상회차 : 16회
  • 소속 : 청소년부
  • 장르 : 청소년부 글쓰기
할머니네 동네에서는 할머니가 가장 나이가 많으시다. 그럼에도 매우 건강하고 유쾌하신 할머니가 나는 참 자랑스럽기도 하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 곳에는 할머니 보다 나이가 많은 것들이 아주 많다.
우선 할머니네 집 옆에 늠름하게 서 있는 은행나무가 그렇다. 할머니께서 처음 시집을 오셨을 때도 은행나무의 키가 지금과 똑같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그 은행나무가 주는 그늘은 온 동네를 감싸고도 남는다.
또 할머니가 증조할머니께 물려받아 가끔 칼국수를 만드실 때 사용하는 홍두깨가 그렇다. 그 홍두깨의 나이가 몇인지 할머니도 모르겠다고 하신다.
그런데 그것들은 언제나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정말 놀라운 건 할머니네 집 앞을 흐르는 백운 계곡이다.
가야산에 둘러싸인 이 계곡은 도대체 언제 생겼는지도 모르겠지만 또 언제나 그 자리에서 같은 양이 물이 흐른다고 한다.
날마다 물이 흘러가지만 조금도 양이 줄거나 늘지 않고 그대로 흐르니 흐르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늘 새로운 물인 것 같기도 하고 나도 잘 모르겠다.
하여튼 이 계곡이야말로 할머니보다 나이가 몇 백배는 더 많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이렇게 나이 많은 어르신인 이 계곡이 젊은 사람들 때문에 수난을 당하는 중이다.
불효도 이런 불효가 없을 것 같다.
멀리 대구나 경산에까지도 이 계곡이 얼마나 시원하고 맑은 지 소문이 났다고 한다. 그래서 겨울을 제외하고 언제나 이 계곡에는 사람들이 찾아와 발 디딜 곳이 없을 정도이다.
아름다운 계곡을 알아봐주고 찾아 주는 것은 좋지만 할머니네 마을 사람들은 정말 괴롭다고 하신다.
사람들은 계곡에 도착하면 먼저 텐트를 친다. 하루 반나절 놀다 가기 위해 텐트 장비를 트럭에 싣고 오기도 한다. 텐트를 치느라 나무를 부러뜨리는 것은 흔한 일이고 아예 뿌리째 뽑아 버리기도 하고 수백 년 그 자리를 지켜온 바위를 함부로 이리저리 옮기기도 한다.
사람들이 노는 방법과 순서는 어쩜 그리도 같은지 그 다음엔 일제히 숯불을 피워 고기를 굽는다.
숯불을 피울 때 흘러나온 매캐한 연기는 온 산을 휘감고 나무들을 괴롭히다가 드디어 마을 어른들이 사는 집에 찾아와 방안으로 들어온다.
청하지도 않은 불청객이 당당하게 들어가 마을 어르신들을 기어이 울리고야 만다. 눈이 매워 눈을 뜨지 못하시겠다고 하신다.
고기를 굽느라 흘러나온 기름은 계곡물을 따라 떠내려간다. 맑았던 계곡물은 기름물이 되어 흘러가고 기름이 섞인 물을 마실 나무들과 물고기들은 또 어떻게 될 지 걱정이다.
사람들은 고기를 그냥 조용히 먹으면 맛이 없나보다.
큰 소리로 노래를 켜놓고 따라 부르며 또 술도 마셔가며 먹어야 고기 맛이 나나보다.
남은 음식물은 물을 따라 떠내려가고 남은 소주병은 하얀 바위 옆에 이리저리 누워 잔다.
그 다음엔 또 똑같다.
배를 채운 이들은 물속으로 첨벙첨벙 뛰어든다.
깊은 물에 들어가지 말라는 팻말은 뽑아서 깊은 물에 들어가는 도구로 쓰며 쓰레기를 버리도록 준비한 봉투는 쓰레기가 되어 갈 곳을 잃는다.
화장실이 급하면 계곡은 화장실이 되고 빨래가 급하면 계곡은 빨래터가 된다.
저물녘이면 그들의 텐트는 떠나가고 그들이 남긴 소주병과 술 취한 노랫소리는 웅성웅성 마을을 맴돈다.
그렇게 그들은 떠나가고 산과 계곡은 병들고 마을 사람들은 슬프다.
계곡 옆에 쌓인 쓰레기에서 흘러나오는 악취가 마을 사람들의 슬픔이 되고 나무들의 눈물이 된다.
산과 계곡은 그렇게 여름을 앓고 가을을 앓는다.
그렇게 산과 계곡은 나이를 먹는다.
앞으로 몇 살을 더 건강히 살 지 모르겠다.
할머니가 태어나기 전에도,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가 태어나기 전에도 누군가 깨끗이 아껴 주어 지금껏 맑은 모습을 유지한 이 아름다운 자연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만의 것일까?
오만하고 무례한 사람들 때문에 할머니도 나도 은행나무 그늘 아래서 속이 상한다.
만족도조사
열람하신 정보에 대해 만족하셨습니까?
만족도조사선택

COPYRIGHTⒸ 산림청 SINCE1967.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