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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계양산에 관한 소묘
  • 입상자명 : 진 상 용
  • 입상회차 : 7회
  • 소속 : 일반부
  • 장르 : 일반부 시·수필

올 가을 들어 첫 휴일, 오랜만에 아버지를 모시고 산에 가기로 작정했다. 버거스C 병으로 한쪽 다리를 잃은데다 팔순 앞둔 고령의 노환으로 혼자 힘으론 운신도 못하시는 까닭에 멀리 가는 건 무리이니 가까운 산이나마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사실 앞에 밝힌 것 외에 이유 하나가 더 있다.
아버진 불편한 몸을 끌고 자꾸 좁은 베란다로만 나가려 하셨는데, 그것이 창문을 열어 신선한 바람을 쐬거나 햇볕이 그리워서만이 아님을 한참 뒤에야 알게 된 것이다.
고향 강원도를 떠나 인천에 뿌리 내린 지 20여 년, 당시의 아버지는 건강했고 산을 좋아하셨기에 우린 함께 계양산에 오르곤 했었다. 지병의 악화로 10여 년째 누워 지내시지만 우리가 처음 이곳에 이사를 올 당시엔 베란다 밖으로 계양산이 마주 바라다보였다. 비록 작은 방이나마 따로 마련해 드렸음에도 그토록 베란다에 집착하시는 이유가 바로 사철 변해가는 산의 모습을 감상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인천의 진산(鎭山)이라 할 계양산(桂陽山)을 나도 꽤 좋아한다. 해발 394m로 인천에선 가장 높은 산으로서 계수나무와 회양목이 많아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 나무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
강화도의 마니산이 형이고 계양산이 아우라 불릴 만큼 명산이며 날씨 변화에 따라 산 중턱까지 구름에 휩싸이기 때문에 멀리서 보아도 운치가 있다.
그러던 재작년 어느 날부터 공터에 건물들이 불쑥불쑥 들어서더니 아파트가 산을 완전히 가로막아버렸다. 창문을 통해 바로 보이던 산이 아버지의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다.
꼭 그래서라고 끌어대기는 뭣하지만 그 뒤부터 아버지의 병력엔 치매 한 가지가 더 늘어나게 됐다. 소꿉장난을 즐기는 다섯 살 아이가 되었고, 당신 혈육들 얼굴조차 잃어버리고 말았다.
승용차를 산 밑의 주차장에 대놓은 다음 아버지를 휠체어에 옮겨 앉힌다. 그리고 산책로를 따라 휠체어를 민다. 잘 가꿔진 자연공원 휴양림의 나무와 꽃들을 바라보시는 시선에 모처럼 생기가 돈다. 어느덧 아버지의 눈길은 높디높은 산 정상을 향한다. 예전처럼 다리 튼튼하다면 한달음에 달려 오르실 것을.
길가 한적한 곳에 휠체어를 비켜두고 아버지를 업었다. 앙상한 뼈만 잡히는데다가 그나마 절반만 남은 육신은 낙엽인 듯이 가볍다.
줄줄이 오르고 내려가는 등산객들이 우리 부자의 산행을 기이한 광경인 듯 힐끗거리며 길을 비켜준다. 아무리 등산로를 손질해 놓았다고는 하나 쉰다섯 나이에 무릎관절도 좋지 않은 내가 아버지를 업고 오르기엔 만만치 않을 만큼 산이 가파르고 험하다.
문득, 옛일 하나가 기억되었다.
어린 시절의 고향 마을 뒤엔 큰 낭떠러지가 있고 거기에는 ‘공굴장’이란 풍습이 있었다고 전해져 왔다. 예전 살기 어려운 시절에 지독한 흉년이 닥치면 늙고 병든 부모를 지게에 져다가 그 벼랑 아래로 굴려버린다는 거였다.
한 사람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가서 아버지 공굴장을 치르고 돌아서는데 아이가 지게를 버리지 말고 가져가자 하더란다. 잘 두었다가 나중에 저도 아버지를 져다 버려야 할 게 아니냐는 말을 듣고 그는 아버지를 다시 집으로 모셔왔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함께 뒷산에 올라 땔나무를 주우면서 아버지가 들려주신 얘기다. 검불처럼 야윈 아버지를 업고 산을 오르며 그런 기억을 떠올리게 된 게 아주 큰 불경(不敬)이긴 하다.
산의 절반도 못 올라왔는데 힘이 빠져 다리가 후들거리고 가쁜 숨이 턱을 치받는다. 아버지를 산 중턱의 너럭바위에 조심조심 내려서 앉혔다. 솔숲 냄새 가득 묻은 가을바람 한 줄기가 시원하게 불어준다.
산기슭을 덮은 숲이 눈에 들어왔다. 산 속 나무들도 사람세상과 다를 바 없어서 곁의 나무에 기대서 피해를 주는 게 있는가하면, 천년 세월을 꼿꼿이 선 채 살아가는 고고한 나무도 있다.
아, 볼수록 계양산은 얌전한 새색시보다 더 몸가짐이 바르다. 겉옷자락을 안으로 끌어 여미며 속살이 드러날세라 추스른다.
묏새가 멧새를 부르는 저 등강너머엔 산국향기에 취한 산토끼가 낮잠을 자고 있을 듯 고즈넉하고, 꽃단풍이 들기 시작해 더 고운 산, 가을엔 산이 먼저 풍년이다. 가을 산은 세상에서 젤 부자이고, 늘 자기 것을 남에게 베풀어주는 알부자다.
다시 아버지를 업고 걸음을 떼었다. 뒤따라 오르던 중년의 남자가 고맙게도 등을 밀어준다. 없던 힘이 솟아나고 두어 시간 만에야 정상을 밟았다.
여러 방면의 등산로를 따라 올라온 사람들이 어우러져 땀을 식히고 있다. 각자 다른 길을 따라 올라왔지만 한곳에 모여 나름대로의 성취감을 만끽한다. 이들 중에서 오늘은 아버지가 가장 연장자일 듯싶다.
산봉우리에선 사방이 모두 내다보인다. 북쪽의 김포·고양, 동쪽의 부천, 서쪽으로 눈을 돌리면 드넓은 서해. 그러고 보니 허허벌판에 우뚝 서있던 이 산이 불과 이십여 년 만에 도심 속의 섬이 되어버렸다.
산 뒤쪽으로 눈을 돌린다. 차라리 그쪽은 보지 않는 편이 좋을 걸 그랬다. 큰 병 걸린 노파처럼 온몸 다 망쳐버린 산은 붉은 멍이 든 채 늘어진 젖가슴을 감출 줄도 모르는가. 단지 풍광이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살점을 다 찢어가며 부스럼 같은 건축물들이 산의 발치를 더듬어 올라온다.
새로 골프장을 짓네, 마네, 강행하려는 대기업과 이를 반대하는 시민들의 싸움이 갈수록 치열한 계양산은 돈에게 겁탈당하여 마지막 수치심도 잃어가고 있었다.
석양이 붉다. 서해로 지는 노을을 안고, 아버지를 등에 업고서 산을 내려온다. 올라갈 때보다 결코 만만치 않은 하산 길.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찾아올 산이 아주 가까이 있음에도 그동안 참 무심하였다. 노인의 근력이란 아무도 믿을 수 없기에 이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산행일지, 다음 주에라도 거듭 오게 될지는 장담하지 못한다. 내년 봄의 나무 햇순과 다시 단장할 가을 산을 보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일 뿐.
칼바람 시작되기 전에 다시 찾아오리라. 조물주께선 나와 같은 게으름뱅이를 위해 머나먼 설악산, 지리산을 이렇게 가까이에다 옮겨놓아 두셨을 터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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