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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선 숲 속엔‘오래된 미래’가 산다
  • 입상자명 : 박 종 현
  • 입상회차 : 8회
  • 소속 : 일반부
  • 장르 : 일반부 시·수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연은 후손들로부터 빌린 것이다. 빌린 본전(자연)을 까먹지 말고 그 이자만 가지고 살다가 그 본전만큼은 고스란히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말한 소설가 박경리 선생의 생명사상이 담긴 ‘본전론’이 새삼 떠오른다. 우리는 지금 개발이라는 휘호 아래 마음대로 자연을 훼손하거나 파괴하고 있다. 잘 보존된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게 우리를 건강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지름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올해로 15년째 나는 걸어서 다닌다. 직장에서 집으로 가는 중간에 있는 야트막한 선학산 숲길을 에돌아 6km 남짓 되는 거리를 1시간 40분이나 걸려 걸어 다닌다. 처음에는 만성간염과 초기 우울증, 그리고 어지럼증, 약시 등 걸어 다니는 종합병동인 내 병을 고치기 위해 걸어 다니다가 요즘 와서는 하루라도 산길을 걷지 않으면 오히려 병이 날 지경으로 걷기에 중독되어 버렸다. 지금에사 산과 숲이 지닌 진정한 매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근무를 마치고 20여 분을 걸어서 차들이 붐비는 시내를 빠져 나오면 선학산 숲길 초입에 들어선다. 길 옆으로 열병한 삼나무들이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 채 나를 안내한다.
오르막으로 막 들어설 때면 꽃향기 지천으로 풍기던 아카시아 잎들이 유년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가 하면 낮은 키로 탐스럽게 익은 빨간 산딸기가 길도 없는 산기슭으로 나를 유혹하기도 한다. 손바닥에 딸기물이 배도록 따먹고 나서 다시 가파른 오르막을 반 시간 정도 오르고 나면 정상이다.
정상, 벚나무숲으로 조성해 놓은 체육공원에서 잠깐 땀을 말리곤 곧바로 하산길로 접어든다. 한참 내려오다보면 작은 골짜기를 만난다. 땀범벅이 된 얼굴을 찬물로 훔치고는 물 위에서 유유히 유영하는 소금쟁이, 물매미, 무당개구리를 보고 있노라면 풀벌레 소리와 매미소리, 뻐꾸기울음이 떼지어 골짜기로 몰려든다. 푸르른 내 몸 속 가득 풀벌레 울음으로 채워지는 듯하다. 숲속 개울물에 비친 맑은 내 모습을 보면서 내려올 때면 온 세상이 모두 내 것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숲에서 나오는 천연 항생제인 피톤치드를 마시며 각시붓꽃, 이질풀, 골무꽃 등 다소곳하게 핀 예쁜 꽃과 원추리, 병꽃, 쑥부쟁이, 구절초, 개미취 등 제법 돋움발을 해서 제 색깔을 뽐내는 꽃들이 이른 봄에서 가을까지 길섶에 나와 나에게 계절 인사를 건넬 때면 하루의 피로가 씻은 듯이 날아가 버린다. 몸도 한결 가벼워지고 머릿속을 지배하던 잡념들도 사라져 버린다. 이런 생활을 반복하다보니 산과 숲은 걸어다니는 종합병동인 내 몸을 건강한 몸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젠 숲길을 걸으면서 나무들이 풍기는 향기도 제각기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낮은 산기슭에 서식하는 오리나무나 아까시나무와 같은 잡목에서는 좀 눅눅하고 비릿한 냄새가 나고, 산등성이부터 정상까지 지배하고 있는 소나무나 잣나무에선 맑고 상쾌하면서도 달근한 향기가 난다. 그리고 숲은 어느 수종이든 거만을 피우거나 세상을 독점하는 법이 없다. 소나무나 오리나무와 같은 키 큰 나무는 그 아래 국수나무와 거북이손 등 키 작은 나무들을 돌보며 함께 살아가고, 가장 낮은 바닥에는 마삭줄이나 달개비와 같은 풀들이 서식한다. 이처럼 숲은 크고 작은 나무, 잘나고 못난 나무들이 어우러져야 비로소 하나의 세상을 이룬다는 걸 숲길을 걷는 나에게 가르쳐준다.
산과 숲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갈 무렵,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 이유미의 『우린 숲으로 간다』, 소로우의 『월든』등을 읽고 감동을 받아, 환경과 생태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한 말을 나는 ‘아는 만큼 사랑한다.’로 바꾸고 싶다.
숲길을 걸으면서 나무들의 생태와 숲의 천이에 대해 알고, 숲-나무와 더불어 꽃과 곤충에 대해 알게 되면서부터 자연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고, 더불어 꽃과 곤충에 대해 알게 되면서부터 자연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고, 그 관심이 자연 사랑을 몸소 실천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도록 했다.
산과 숲은 사색의 공간이자 창작의 공간이며, 생명과 건강의 공간이자 어머니의 공간이다. 숲과 숲길이 있었기에 사상과 종교가 싹틀 수 있었고, 숲이 있기에 뭇 생명이 둥지를 틀 수도 있지 않는가. 인간의 정신을 가꾸게 하고 건강을 지켜주는 숲, 숲속의 수많은 생명들이 우리를 위해 꽃피고 노래하고 그늘을 주며, 나아가 그들의 목숨까지 우리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 있음을 직접 본 나는 숲이 곧 나의 스승임을 깨달았다.
숲과 산, 우리가 사는 이 자연은 후손들로부터 빌려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숲과 산, 자연이 주는 혜택을 맘껏 누릴 자격은 있을지언정 그들을 짓밟거나 정복할 권력은 없다. 우리가 빌려 쓰고 있는 이 자연을 처음의 온전한 모습대로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한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숲길에서 건강하고 행복한 모습으로 살아갈 우리 후손들의 ‘오래 된 미래’를 떠올리는 내 머리 위에서 소나무, 오리나무, 산벚나무들이 일제히 손을 뻗어 하늘에다 넓고 푸른 둥지 하나를 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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