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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선 준경묘와 미인송
  • 입상자명 : 이 분 희
  • 입상회차 : 8회
  • 소속 : 일반부
  • 장르 : 일반부 시·수필

2001년 봄이었던가? 딸아이가 삼척초등학교 6학년이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하는 말이 “엄마 준경묘에서 소나무 전통혼례식을 하는데 우리 반 친구 신영이가 신부로 선택이 되었어요.” 라고 자랑삼아 떠드는 것이었다.
우리 부부는 “소나무가 무슨 전통혼례식을 해?” 그리고 “초등학생이 또 무슨 신부야!” 라고 하면서 한참을 웃기만 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며칠 뒤 뉴스를 통하여 딸아이가 말한 소나무 전통혼례의 연유를 알 수가 있었다.
보은에 있는 정이품송이 수명이 다하여 볼품이 없어지자 산림청 국립산림과학원은 한국을 대표하는 소나무의 혈통보존을 위해 10여 년의 연구와 엄격한 심사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형질이 우수하고 아름다운 소나무를 찾은 결과 준경묘의 미인송이 선택되었고, 그해 5월 8일 전통혼례의식에 따라 신순우 산림청장이 주례를 맡고 보은의 정이품송이 신랑이므로 보은 삼산초등학교 6학년 이상훈 군이 신랑 역을 맡았다.
그리고 삼척 미인송이 신부이므로 신부 역은 딸애의 친구인 삼척초등학교 6학년 노신영 양이 맡았다고 한다. 신랑 혼주는 김종철 보은군수가, 신부 혼주는 김일동 삼척군수가 맡아 치러졌으며, 그 후 두 소나무는 혼례식을 치른 최초의 소나무로 한국기네스에 등재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후 아이들 공부와 남편 뒷바라지에 6년여의 세월을 정신없이 보내다가 우연한 기회에 삼척시립박물관에서 운영하는 숲해설가 교육과정을 이수하면서 준경묘를 처음 접하게 되었고, 2007년 하반기부터는 삼척국유림관리소 소속 숲해설가로 십수 차례 준경묘를 드나들면서 주변 식생과 준경묘에 대한 해설을 해오고 있다.
제7호 태풍 갈매기가 전국 곳곳에 피해를 입히고 지나가던 7월 20일 식구들과 준경묘를 찾았다. 소나무 전통혼례식 후 7년, 그 사이에 어엿한 대학생이 된 딸과 고등학생이 된 아들, 그리고 남편, 정말 오랜만에 네 식구가 함께한 오붓한 산행이었다.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마을회관 앞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려 준경묘 입구 쪽을 바라보니 산은 안개에 가려 있고 안개비인지 이슬비인지 모를 빗방울만 간간이 날리고 있었다.
준경묘 입구로 들어서서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기 시작한 지 10분여가 지나자 딸아이의 콧등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하기에 뒤를 돌아보니 뱃살이 넉넉한 남편은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다리쉼도 하고 땀도 식힐 겸 하여 식구들에게 나무와 풀 몇 종류를 설명한다. 고욤나무, 갈참나무, 노란 물봉선, 사위질빵 등 눈에 띄는 몇 가지를 짚어가며 설명하니 옆에서 듣고 있던 남편이 아는 체하며 몇 마디를 한다. 남편은 두메산골에서 나고 자라 웬만한 나무와 풀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기에 숲해설에 더러 도움이 되기도 한다.
또 다시 가파른 길을 오르기를 5분여 드디어 평탄한 길이 나타난다. 이쯤에서 또다시 직업병이 발동한 나는 “보통은 침엽수와 활엽수가 공존하는데 여기는 이상하게도 길 아래쪽은 활엽수인 참나무 종류가 많고 길 위쪽은 소나무가 주로 서식한단다.” 라고 설명을 하고 나니 남편이 하는 말 “어! 정말이네 일부러 길을 그렇게 낸 것도 아닐 텐데 이상하게 길 아래 위 쪽으로 수종이 다르네.” 하면서 신기하다고 한다.
길 아래쪽에 있는 계곡이 평소에는 메말라 있었으나 때마침 태풍 갈매기의 영향으로 내린 비 때문에 작은 폭포를 이루면서 우렁찬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게다가 폭포 때문에 계곡 전체를 덮은 뿌연 물보라 사이로 물까마귀 몇 마리가 먹이를 찾아 날고 있는 모습은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원시림의 한 장면을 보는 듯 신비하다 못해 두려운 마음까지 들게 하고 있었다.
준경묘를 향해 안으로 들어갈수록 길 위쪽의 송림은 점점 더 우거지고 땅거미가 내리는 듯 길바닥은 어두워져 간다. 땀에 젖었던 몸이 식어 등이 선선해질 즈음 길 위쪽에 울타리로 둘러싸인 소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이 소나무가 정이품송과 혼례한 소나무 곧 미인송이라고 불리는 소나무이다. “수령이 100년, 둘레 2m, 높이 32m….” 중얼대며 설명을 읽고 있던 남편이 미인송을 쳐다보면서 하는 말이 “야! 정말 멋있다. 뭐라고 해야 하나, 황홀하다고 해야 하나? 현기증이 난다고 해야 하나? 끝내준다 정말.” 심심산골에서 나고 자라서 소나무는 많이 보았으련만 이렇게 아름답고 황홀함마저 느끼는 소나무는 처음이란다. 그리고 왜 미인송이라 하는지 이해가 된단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었는데 자주 보니 이젠 무덤덤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옆에서 소나무 전통혼례에 대한 설명을 읽고 있던 딸애가 “잘하면 내가 신부를 할 수 있었는데….” 하면서 말끝을 흐린다. 아들놈이 무슨 말인가 싶어서 “누나! 왜?” 하면서 질문을 하자 “내가 키가 좀 작아서.” 라고 대답한다. 당시에 딸애가 삼척초등학교 어린이회장이었는데 키가 작아서 신부 선정에서 탈락한 것으로 생각하나보다.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왼쪽으로 눈을 돌리니 준경묘가 보인다. 언제 좁은 숲 사이로 올라왔나 싶게 넓은 분지가 펼쳐지고 낙락장송 사이로 하얀 안개에 둘러싸인 준경묘가 보인다. 안개 탓일까? 평소와는 다른 모습에 경외감이 든다. 일부러 산을 깎은 것이 아닐까 싶게 산세가 끝나는 마지막 지점에 봉긋하니 봉분이 보이고 묘의 좌우로는 묘를 지키는 호위군처럼 쭉쭉 뻗은 금강송 군락이 에워싸고 있다.
이곳은 풍수지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필히 찾아오는 답사 코스이고 풍수지리를 모르는 사람이 봐도 명당이라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5대 후에 왕이 나온다는 말을 듣고 흰 소의 피와 귀리 짚을 이용하여 장례를 치렀다는 목조의 백우금관 전설을 되씹으면서, 부모가 자식의 성공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깔끔하게 다듬어진 잔디밭 위에는 수많은 잠자리가 날고 있었다. 이곳의 잠자리들은 사람 구경을 못해서 그런지 사람을 봐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머리 위에도 어깨 위에도 심지어 내미는 손가락 위에도 날개를 내리고 앉는다. 그 모습이 신기한지 딸은 손을 내밀어 손가락 마다 잠자리가 앉기를 유혹하며 재미있다고 깔깔거리며 웃는다.
일자각 옆에 있는 우물물로 목을 축이고 올라온 길을 뒤돌아보니 앞에서 볼 때와 또 다른 모습이 펼쳐진다. 전후좌우로 금강송이 빽빽하게 도열하여 준경묘를 호위하고 있는 듯하다.
이곳 금강송은 재질이 우수하여 1968년 광화문 복원에도 이용되었고, 2008년 2월 화재로 소실된 숭례문 복원을 위하여 이곳의 금강송을 이용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숭례문 복원도 중요하지만 아름다운 금강송 숲을 앞으로 100년, 1000년 동안 볼 수 있도록 특별한 보호 대책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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