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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선 숲의 속삭임
  • 입상자명 : 황 재 홍
  • 입상회차 : 8회
  • 소속 : 청소년부
  • 장르 : 청소년부 글쓰기

누그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푹푹 찌는 더위의 연속과 따닥따닥 붙어 앉아 학교에서 하루 종일 공부하는 나 자신을 바라보며 나는 답답함과 함께 무언가를 잃어버린 커다란 상실감을 느꼈다. 흑성산에 가면 할아버지와 할머니 산소가 있는데 그곳에서 우리 가족은 원래 봄마다 쑥과 냉이를 캐서 쑥떡도 해먹고 냉잇국도 끓여먹었다. 그러나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부터 쑥과 냉이를 캐러 산에 가지 않았다. 산에서 점심을 먹고 산들산들 불어오는 따스한 바람과 함께 낮잠을 자던 추억이 떠오르는 순간 교실시계가 째깍거리며 수업에 집중하라고 화를 냈다. 짜증이 밀려온 나는 점심시간에 운동장 한 바퀴를 돌며 교실 밖에 서 있는 나무들을 보며 마음을 달래리라 생각하였다.
학교에는 생각보다 굉장히 많고 다양한 나무들과 꽃이 있었다. 몇몇 나무들은 벌써 단풍이 들 기세를 보이고 있었다. 나는 왜 매일 다니는 학교에서 이런 경이로운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몰랐을까? 수많은 나무들, 아름다운 꽃들 그 주위를 돌고 있는 나비들이 내 눈 앞에 있었고 나는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느꼈다. 그런데 마음속 한 구석이 아직도 차지 않았음을 느꼈다. 학교에는 한 가지 없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숲의 속삭임이었다. 학교에 서 있는 나무들은 목소리가 없었다.
나는 부모님과 상의 끝에 산에 잠깐 다녀오기로 했다. 산에 가기 5일 전부터 나는 몹시 설레였다.
어떤 날을 손꼽아 기다려본 것이 오랜만인 것 같았다. 산에 간다는 것은 단조롭고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나의 일상을 깨버린 커다란 변화였다. 이 변화는 내게 활력소가 되었으며 우리 가족 모두에게 필요했던 휴식의 시간이었다.
산에 가면 나와 친척언니, 친척오빠의 나무가 있다. 매실나무인데 초등학생 때 식목일날 묘목을 사다가 심었던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매실나무에 열린 매실로 엑기스도 만드시고 매실주도 담그셨다. 나는 성격이 예민한 편이라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배가 아픈데 매실이 소화불량과 위장장애를 막아준다며 매년마다 아버지께서는 매실을 따 오셨다.
드디어 산에 도착하였다. 싱그러운 풀 내음새를 머금고 살랑거리는 바람이 내 코끝을 간질였다. 나는 하늘 위에 강렬한 빛을 내뿜고 있는 태양이 만들어내는 나의 땀방울조차 반가웠다. 학교에서는 그렇게 싫었던 후덥지근한 공기가 오늘따라 포근하게 느껴졌다. 모든 일은 사람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산에 뛰어올라가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바람이 불어온다. 잔잔하게 일어나다 점점 거세지는 바람이 나무들과 부딪치며 쏴아 하는 소리를 낸다. 바로 이것이었다. 숲의 소리, 나무들의 목소리는 바로 이 쏴아 하고 울려 퍼지는 그들의 함성소리였다. 내가 너무나도 듣고 싶어하던 바로 그 소리였다. 자연의 소리가 너무 아름다워서 노래를 부르고 싶었지만 내 목소리와 나무들의 소리가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멈칫했다. 그때 저 멀리서 새들의 합창이 들려왔다. 나는 잠시 청중이 되어 나무와 새와 숲의 합창을 들었다. 그러다가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눈에 띌 정도로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 만큼 빨리 무엇인가를 기억해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매실나무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나무에게 냉큼 달려갔다.
매실나무는 오래 전부터 기다려왔다는 듯이 한자리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식물은 말을 할 수 없어도 감정은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예전에 한 과학자가 수박을 가지고 실험한 연구 보고서를 본 적이 있는데 보고서에는 칼을 들고 수박을 자르려는 순간 수박에서 보통 때와는 달리 커다란 파장을 보냈다는 결과가 나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예전부터 식물의 모습이든 샤프의 모습이든 어떤 형태로든지 만남이 있다면 나와의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인연의 줄을 당겨 만나도 한 사람은 그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저 평범한 만남으로 생각하는 것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무를 보고 나도 나에게 주어진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매실나무는 마치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소설에 나오는 나무처럼 내게 열매를 주기도 하고 그늘을 만들어주기도 하였다. 생각해 보면 나무의 입장에서 열매라는 것은 자신이 1년 동안 온갖 정성을 쏟아 부어 완성한 보물인 것이다. 나무의 1년을 나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당연한 듯 가져갔었다. 나무의 속삭임이 바람을 타고 내 귓가로 날아왔다. 이제야 나는 나무의 기다림을 눈치챘다. ‘나무야, 얼마나 오랫동안 말없이 같은 자리에 서서 기다려왔니. 내가 이 말을 할 때까지 말이야. 난 너에게 정말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순간 나는 이 나무와 나는 보통 인연이 아닌가 보라고 생각하였다. 나무는 나를 기다렸고 나는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를 기다렸으니 말이다.
사회 속에서 상처받고 응어리져 있던 나의 마음이 사르르 녹기 시작하였다. 산에 오기 전에 나는 아무도 나를 진심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들이 진심이었는지 거짓이었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모든 것이 가식처럼 생각되었었다. 나의 비뚤어진 시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묵묵히 한자리에 서서 아무도 지켜보지 않고 응원하지 않아도 자신의 할 일을 쉬지 않고 하는 나무를 바라보며, 자신의 일생을 바쳐 만든 것을 아무런 보상 없이 가져간다 해서 화내지 않고 언젠가는 자신의 노력을 알아줄 것이라고 믿는 기다림의 자세를 바라보며, 그리고 그것을 몰라줬던 이들을 처음부터 용서하고 있던 매실나무를 바라보며 어느새 나의 마음은 울고 있었다. 매실나무처럼 나도 계속 내 자리를 지키며 언젠가는 사람들이 나의 열매를 알아봐줄 날이 오리라는 믿음을 갖자고 다짐하였다. 새들과 나무와 바람이 합창을 하던 것처럼 나도 다양한 여러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하며 그들과 화합하여 손에 손을 잡고 힘차게 살아나가자고 결심하였다. 공지영의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에 나오는 한 구절인 “나는 너 없이도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지만 세계는 내 눈에 영원히 불완전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라는 말이 한층 더 내게 의미 있게 다가온 순간이었다. 내가 상처라고 생각했던 것들, 그것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이런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을 것이다. 상처가 있었기에 눈물이 있었기에 이 세계는 내게 완전한 것으로 보여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은 내가 산에 오지 않았더라면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숲의 속삭임이 멈춰 있던 내 심장을 뛰게 하였다. 난 숲속에서 뛰고 있는 나의 심장을 발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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