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프린트하기
은상 가시버시산에 안개가 흐른다.
  • 입상자명 : 권신영
  • 입상회차 : 11회
  • 소속 : 청소년부
  • 장르 : 청소년부 글쓰기

할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새벽만 되면 산에 오르셨다. 그런 할아버지와 함께 산을 오를 수 있는 날은 오로지 명절날뿐이었고, 시골집에서 잠을 설쳐하던 나는 해도 뜨지 않은 새벽에 나가시는 할아버지를 조용히 뒤따라 나갔다. 할아버지께서는 말없이 내 앞에서 저벅저벅 흙길을 걸어가셨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께서 심으셨다는 늙은 버드나무를 지나 징검다리를 건너니 안개에 휩싸인 가시버시산이 보였다.
가시버시는 부부의 고유어로, 두 개의 부부 산을 합해서 동네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었다. 키 작은 산은 가시산, 키 큰 산은 버시산, 합해서 가시버시산이라 부르는 그 두 개의 산은 정말 금슬 좋게 붙어 있었다. 멀리서 보면 봉긋봉긋한 두 개의 산이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듯한 형상이었다.
이제는 뵐 수 없는 나의 할머니께서는 가시산에 계셨다. 5년 전, 화려한 색동 가마가 이 흙길을 지나가던 장면은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날 덤덤히 나를 지나쳐 가시건 할아버지의 모습도, 그리고 오늘, 나는 할아버지께서 함께 다시 이 길을 걷고 있었다. 벌레소리와 발걸음 소리만이 들리는 신새벽 길을.
갈래길의 왼쪽으로 들어서 가시산을 올라가기 시작하자 눈앞에 희뿌연 것이 꼈다. 한치 앞도 안 보일 정도로 자욱하게 쳐진 안개 사이로 할아버지의 발걸음 소리를 따라 걷다보니 왠지 마음이 노곤노곤해졌다. 촉촉하고 푹신한 안개는 스펀지처럼 나의 몸을 흡수해주었고, 나긋나긋한 가시산의 산길은 발에 착착 감겼다. 꾸꾸, 하며 간간히 들리는 산새소리를 들으며 서울에서는 느낄 수 없던 시골 정취를 맘껏 느끼며 나는 천천히 산을 올라갔다. 흐읍, 하고 숨을 들이키면 은은한 풀냄새, 꽃 냄새가 콧속으로 퍼졌다. 마치 내 몸이 투명한 막이 된 듯, 공기가 내 몸을 통해 흘러갔고 나는 새벽안개에 완전히 동화되었다. 선선한 바람이 나의 목덜미를 간질대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그렇게 얼마쯤 올라가니 동이 트는 듯, 등에서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할아버지의 발걸음이 멈추지 않아 나는 돌아볼 새도 없이 할아버지를 따라갔다.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정상이 가까이 온 듯했다. 그리고 가까워진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시야가 확 트이면서 시원한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휘감고 지나갔다. 숲이 끝나고 탁 트인 산마루가 펼쳐진 것이었다. 그리고 안개가 걷힌 그곳엔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봉긋 솟아오른 언덕도 보였다.
힐끗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니 그날처럼 덤덤한 표정이셨다. 그리고 그 조그마한 무덤에 가까이 갈수록 할아버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나 왔어’ 하고 처음으로 입을 여신 할아버지의 말에 난 왠지 모르게 코끝이 찡해짐을 느끼고 황급히 입술을 깨물었다. 이 말을 하시기 위해 할아버지께서는 아무 말없이 산을 오르셨던 걸까. 터벅터벅 무덤 앞으로 걸어가 손을 짚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평소의 씩씩하셨던 모습과는 다르게 어딘지 왜소해 보이셨다. 거무튀튀하고 굳은살이 잔뜩 박인 험한 손으로 잔디 깐 할머니의 잠자리를 쓰다듬으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굉장히 다정하면서도 경건했다. 나는 그런 할아버지의 곁에 다가가 당신이 하셨던 것과 같이 ‘저 왔어요.’ 하고 배시시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리고 할머니께서 생전에 그토록 좋아하시던, 그래서 더 원망스러웠던 선홍색 장미가 그려진 여성용 담배를 꺼냈다. 시골집에서 나올 때 챙겨 온 것이었다. 그것을 꺼내드니 할아버지께서 웃으며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셨다. 동이 겨우 튼 아침 댓바람부터 담배를 드리는 게 어딘지 꺼림칙했지만 연기가 흘러나오는 담배를 무덤 앞에 놓고 보니 어쩐지 담배를 한 손에 든 채 비녀를 꽂으신 할머니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리는 듯했다.
담배가 다 탈 때까지 보고 있기가 찡해서 나는 뒤를 돌아 바로 앞에 보이는 버시산을 보았다. 희뿌연 안개가 버시산 등성이를 타고 슬슬이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버시산이 잠을 깨고 있는 거란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이부자리를 헤치고 나오는 것 같은 형상이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서서히 드러나는 버시산의 정상을 가리키며 ‘저기에 있으면 가시산의 이곳이 바로 보인단다.’라고 하셨다. 그 모습은 어쩐지 쓸쓸하면서도 행복해 보이셨다.
가시버시산이 몇 백 년, 아니 몇 천 년이 되는 세월동안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듯, 할아버지도 앞으로 수백 년 동안 할머니를 끌어안고 살고 싶으셨나보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할아버지께서 나를 떠나가시고, 버시산에 누우신다면 할머니께선 행복해지실 것 같다. 하루 중 새벽만 볼 수 있었던 할아버지를 매일매일 하루 종일 보고, 또 하얀 이부자리에서 함께 잠을 청할 수 있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산은 인간이 아니지만, 무엇보다 인간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나는 그날에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가시버시산이 서로를 사랑하듯,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도 서로를 사랑하시고, 가시버시산이 서로를 생각하듯, 할아버지도 할머니를 애틋한 마음으로 언제나 떠올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날 가시버시산을 내려오니, 어느덧 안개는 사라지고 초록색 몸뚱이 두 개가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꼭 끌어안고 있었다.

만족도조사
열람하신 정보에 대해 만족하셨습니까?
만족도조사선택

COPYRIGHTⒸ 산림청 SINCE1967.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