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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선 금강산과 나의 추억
  • 입상자명 : 강 수 아
  • 입상회차 : 8회
  • 소속 : 청소년부
  • 장르 : 청소년부 글쓰기

초등학교 3학년, 벌써 8년 전 일이다. 북한의 금강산에 간다는 말, 어린 나에게는 그저 해외여행쯤으로 들렸던 말이다. 이념과 사상이 무엇인지, 왜 한민족이 분단하게 되었는지조차 모르던 철없던 나에게는 대한민국을 벗어난 여행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기만 했었다. 들뜬 마음을 안고 속초항으로 향했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육로를 통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배를 타고 8시간 이상을 가야 했다. 배에 올라탄 어른들의 표정에는 왠지 모를 긴장감과 숙연함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나와 동생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재잘거리기만 했었다. 그런 우리들에게 어른들은 주의하라는 눈짓을 보내시곤 했다. 8시간 항해 후, 북한에 도착했다. 처음 느끼는 북한의 공기, 처음 밟는 북한의 땅, 낯설게 다가오기보다는 새롭지만 친근한 느낌이었다. 숙소는 배 안이었다. 그 당시엔 지금 운영되고 있는 호텔이 없었다. 북한에 도착한 후 2시간을 달려 금강산에 도착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그 맑은 공기는 금강산에 온 것을 실감나게 해주었다. 금강산 첫째날, 우리는 ‘나-2조’에 배정받았다. 항상 이름과 신상명세가 쓰인 목걸이를 하고 다녀야 했다. KANG SOO-A 라는 이름과 내 사진은 우리가 이방인임을 느끼게 해주었다. 첫날 우리는 금강산 중턱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어른들은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속담 그대로라며 담소를 나누며 식사했다. 식사 후 산행으로 수정보다 아름다운 계곡에 도착했다. 물 안의 조약돌들은 마치 돋보기를 대고 보는 듯 하나하나 선명하게 보였다. 생전 처음 보는 깨끗함이 넋을 나가게 하였다. 손가락을 넣는 순간 냉동인간으로 꽁꽁 얼어버릴 것만 같았던 그 물의 차가움은 아직 생생하기만 하다. 산행 내내 다람쥐, 청설모와 도롱뇽이 친구가 되어 주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말 보기 힘든 동물들을 금강산에서 실컷 구경했다. 날이 어두워져서 일행들은 첫 산행을 마무리했다.
산행 이틀째, 우리는 일찍 일어나 첫날보다 높이 올라갈 채비를 했다. 기필코 높이 올라가리라! 하는 의욕에 금강산 초입부터 나와 동생은 일행들보다 앞서 걷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꼬마등산가’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들으며 가이드 언니를 앞질러 가기도 했다. 아빠께서 그렇게 구룡폭포, 비봉폭포하며 노래를 부르시던 그 폭포에 도착했다. 선녀가 내려와 계곡에서 목욕을 하고 올라간다는 전래동화의 내용이 떠올랐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아득히 우리들 발밑으로 떨어져 내려갔다. 끝없이 이어지는 폭포를 보면서 대자연의 위대함을 어린 나이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와 동생은 너무 어리기도 하고, 금강산 정상이 험준하여 올라갈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금강산의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나와 동생은 수다를 떨며 어른들을 기다렸던 탓인지 생각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려오면서 가이드 언니에게 금강산은 계절마다 이름이 다르다는 말을 들었다. 아니 어째서 한 산에 이름이 4개나 되는가 하고 의문을 가지면서도,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열심히 외웠던 기억이 난다. 봄은 말 그대로 금강산, 여름엔 봉래산, 가을엔 풍악을 울려라 풍악산, 겨울엔 개골개골 개골산. 나는 여름에 온 거니까 금강산이 아니라 봉래산이네!
북한 여행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산에 이틀밖에 못 간 것과 더욱 많은 것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금강산에서의 추억을 담아놓고자 사진을 찍었다. 금강산 초입에는 커다란 공연장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서커스를 보았다. 서커스 단원들의 유연한 몸놀림을 올려다보느라고 목이 빠질 것 같았지만 한 장면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금강산을 떠나면서 버스를 타고 가는 도중에 빨간 스카프를 멘 아이들을 보았다. 얼굴이 타서 빨갛게 된 해맑게 웃는 여자아이 모습을 보았다. 아름다운 산 아래의 학교와 어린 아이들, 그리고 그 길을 지키던 북한의 군인 아저씨들, 비록 한 마디 말을 나누어 보지는 못했지만 같은 동포라는 느낌이 가슴 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이라는 노래가 있다. 그 많은 바위 하나하나 이름을 다 알진 못해도 각각의 아름다운 자태와 형상은 잊을 수가 없다. 또한 우리나라의 산과는 달리 철저한 감시 아래 지켜진 아름답고 깨끗한 환경이니만큼 정말 깨끗했다. 비닐봉지, 껌종이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대자연 그대로 유지될 그 곳은 도시의 매연에 찌든 내 폐를 환하게 해주었다. 선인들이 그렇게 찾고 추구해 온 이상향의 장소가 이곳이 아닌가 생각한다.
남한과 북한은 하나이다. 8시간을 배를 타고 금강산을 가야만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같은 민족이 자유롭게 왕래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름답던 금강산의 모습을 각종 매체를 통해 접할 때면 버스 유리 창문 사이로 만났던 아이들이 떠오른다. 그 이후로 이산가족 상봉 프로그램이나 금강산에 대한 정보를 접할 때면 더욱더 코끝이 찡해지곤 했다.
우리나라 내에 있는 아름다운 산들을 많이 가보지는 못했지만 내겐 산이라고 하면 ‘금강산’을 꼽지 않을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금강산 여행 당시에는 느낄 수 없었던 많은 추억과 감정을 이제 와서야 새록새록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금강산이 4계절 다른 이름으로 불리듯이 금강산 여행을 가기 전, 금강산 산행 당시, 돌아온 후 그리고 어느 정도 교육을 받으며 다시 접하는 금강산의 모습은 정해진 하나가 아니라 내 안에 다양한 모습으로 내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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