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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선 청설모는 언제나 나만 보면 도망가 버린다
  • 입상자명 : 조 민 지
  • 입상회차 : 8회
  • 소속 : 청소년부
  • 장르 : 청소년부 글쓰기

답답했던 차에서 내렸다. 몇 시간 동안의 강행군이었던가. 차멀미로 고생하는 건 여전히 고쳐지지 않았다. 시골집에 가기 전, 바닷가에 들러서 저녁에 장작불에 구워먹을 대하와 소라, 전어를 사기로 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코끝을 찌르는 비린내가 풍겨왔다. 생선의 비린내 같은 게 아니라 짭짤한 바다향이 가득 담긴 기분 좋은 비린내였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바다의 향이었는지, 하지만 나는 이 향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방파제에 시원시원 부딪쳐오는 규칙적인 파도의 소리가 좋았다.
내 시골은, 즉 아빠의 고향은 이 대천바다다. 집은 바다에서 조금 떨어져 있지만 그 곳까지 바다향이 전해질 정도로 대천바다의 향은 진했다. 하이타니 겐지로의『태양의 아이』에서도 오키나와 바다의 아름다움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정말 그 소설의 이야기처럼 바다는 반짝거리며 여러 가지 빛의 색을 담고 있다. 어려서부터 봐왔던 바다의 풍경이었지만 서울 아이에게는 감당이 안될 만큼 아름다운 바다였다.
대천의 장점은 그런 푸른 바다와 대조될 만큼 녹색 빛의 산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시골집은 산 중턱을 깎아서 터를 만들어 집을 지었는데, 뒷문으로 나오면 바로 마당을 지나 산으로 갈 수 있다. 어렸을 때 나는 사촌들과 말썽 피우러 다니기에 바빴다. 말썽이란 말썽은 다 피우고 다녔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손꼽히는 건 역시 ‘가시나무사건’이다. 우리 셋은 틈만 나면 손에 농기구를 하나씩 들고 산에 올라가 뛰어놀았는데, 하루는 장난을 치다가 가시나무에 팔을 베였다. 우리들은 어린마음에 ‘나쁜 가시나무! 죽어라!’라고 외치며 손에 들고 있던 낫으로 가시나무를 신나게 썰어 놨다. 몇 시간 후, 우리는 이유도 모른 채 할머니에게 된통 혼이 났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 나무는 할머니가 아끼셨던 두릅나무였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라고 해서 말썽만 피우고 다니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명절에 전 부치기는 거의 엄마와 나의 몫이고, 이맘때면 아빠와 밤을 따러 다닌다. 염소나 닭, 소 먹이를 주러 다니기도 하고 가끔은 어설프지만 장작을 패서 가져다 나르기도 했다.
그래도 작았던 나에게 산은 그냥 뛰어놀 공간 정도의 의미밖에 되지 않았다. 진정으로 산에 대해 알게 된 건 중1 무렵이다. 우연히 『야생초편지』를 읽게 되었는데 그 책을 읽고는 푹 빠져서 길거리 풀 한 포기에도 눈길이 갔다. 시골에 가면 야생초편지에서 봤던 것과 비슷한 풀들이 널려 있는데, 그게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작은 이파리들이 제각각 고개를 내밀고 바람에 살랑거리고 있는데, 그 작은 움직임이 그렇게 예쁠 수 없었다. 특히 지나가다가 책에 있던 식물을 발견하면 어찌나 반갑던지 한 움큼 뜯어서 집까지 가져가기도 했었다. 책에서 본 대로 여러 종류의 풀을 뜯어서 말리고 차를 끓여 먹어보기도 했다. 말 그대로 ‘100% 야생초차’였다. 향이 진하고 은은해서 좋았는데 맛 또한 진해서 먹을 수 없었다나 뭐라나. 철이 들어선지 그 때부터는 마구 베어냈던 두릅나무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올해 시골에 내려갔을 때는 초토화되었던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두릅나무들에게서 두릅을 따먹을 수 있었다. 꼬들꼬들, 쌉쌀한 맛이 일품이었다. 그제야 내가 베어내었던 말라깽이 두릅나무부터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는 굵다란 나무들 모두 숨을 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새벽에 산책삼아 꼭대기까지 올라가 할머니 묘 앞에 앉아 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구름이 흘러가는 것도, 산새와 풀벌레들의 노랫소리도, 나무의 숨결도 느낄 수 있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산에서 불어오는 산뜻한 바람은 싱그러운 느낌이다. 풀밭에 그냥 누워버렸다. 아직 그렁그렁 맺혀 있는 새벽이슬에 등이 젖어왔다. 그렇게 누워 있으면 벌레들이 기어 올라오기도 한다. 예전이라면 무섭다고 난리쳤겠지만 지금은 왠지 친구 같은 느낌이다. 올려다보이는 풍경은 웅장한 나무들의 푸른 손들과 그 사이로 보이는 대천바다처럼 새파란 하늘을 흘러가는 새하얀 뭉게구름. 눈을 감았다. 앞이 보이지 않자 청각도, 후각도, 촉각도 더 예민해진다. 숲이 속삭이고 있었다. 나에게 하는 말은 아닐 테지만 아마 자기들끼리 수다라도 떨고 있는 걸 거다. 도시 사람들은 알까? 바다에서 짭짤하고도 향긋한 비린내가 나듯이 산에서도 초록의 향기가 난다는 것을. 그것이 정확히 무슨 향기라고 말로 표현하기에 내 표현력은 정말 제한적이라는 걸 느꼈다. 폐까지 시원하면서도 공기 한 알 한 알이 사이다처럼 톡 쏘는, 그 향기를 뭐라고 표현할지 정말 힘들다. 비로소 사고가 정지되었다. 녹색의 산의 정기가 온몸에 전해지자 어려운 생각 따윈 하얗게 잊어버렸다. 몸이 가벼워졌다. 곧, 곧 날아갈 수 있을 것같이 말이다.
“민지야! 얜 어딜 간 거니?”
아래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산울림처럼 들려왔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닭장에 가서 달걀을 가져오라는 임무가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달걀을 안고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길을 따라 산을 내려갔다. 바스락… 내가 낸 소리가 아니었다. 꽤 가까운 거리에 청설모 한 마리가 보였다. 청설모도 날 발견하고서 고개를 갸웃거린다. 갈색에 검은 줄무늬가 있는 털이 보드라워 보였다. 청설모는 자주 볼 수 있는데 볼 때마다 저 털을 만져볼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어디에서 주웠는지 제법 큰 당근을 양 볼 주머니에 가득 넣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포로롱거리며 수풀 쪽으로 몸을 감춰버렸다. 해치려는 게 아닌데 왜 도망가 버리는 걸까? 내가 숲의 친구가 아니란 걸 아는 걸까? 나도 친구하고 싶다고! 하릴없이 푸념만 늘어놓았다. 역시나 예상은 했지만 조금은 좌절감을 느꼈다. 쭈그리고 앉아 구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달걀이 무사한지 한 번 확인한 뒤 산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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