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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해산처럼 넓은 숲을 만들어
  • 입상자명 : 이 현 석 서울 휘문고 2학년
  • 입상회차 : 7회
  • 소속 : 청소년부
  • 장르 : 청소년부 글쓰기

화창한 날씨였다. 아침까지만 해도 꾸물거리던 하늘이 동해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버스 창가에 조롱조롱 밝은 햇살을 매달아 놓고 있었다. 마치 4일 동안이나 바닷물 속에 몸 한 번 담가보지 못하고 강원도를 떠나는 우리들에게 미안함으로 인사를 하는 듯했다.
“지금부터 지나가는 산이 해산이라는 곳입니다. 산길이 구불구불하여 매우 위험하오니 이 산을 통과하기까지는 음악도 끄고 조용히 가도록 하겠습니다.”
좁은 길에 산세마저 험한 길을 엉금엉금 기어오르는 버스처럼 운전사 아저씨의 목소리도 너무나 조심스러웠다.
“장관일세, 장관이여….”
비좁은 길 위를 위태로이 달리는 버스 안에서 마른침을 삼키며 손에 땀이 나도록 손잡이를 꽉 잡고 가는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누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직 산 속에 숨어 있던 영롱한 이슬의 품에 뒤늦게 햇살이 닿았는지 산골짜기마다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가까이에서부터 시작된 푸르름은 끝도 없이 펼쳐져 나가 어릴 적 보았던 시골 마을의 밥 짓는 연기처럼 안개는 산골짜기를 둥둥 떠다니며 감추어 두었던 해산의 모습을 조금씩, 조금씩 보여주고 있었다.
“이렇게 끝없이 펼쳐져 있는 숲은 군대 있을 때 보고 30년 만에 처음 보는구먼….”
손에 손을 잡고 어우러진 숲을 바라보며 환호성이 아닌 아쉬움의 탄식을 내어놓는 옆자리에 앉아계신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두 쪽 다리를 모두 잃으신 아저씨는 혼자서는 다닐 수 없는 분이셨다. 휠체어에 몸을 실어도 누군가가 밀어주지 않으면 많은 거리는 이동할 수 없는 중증장애인이었다.
그동안 1년이 넘게 중증장애인들의 목욕봉사를 다니면서 목욕탕에 들어갈 때도 아저씨와는 거의 말을 하지 못했었다. 아니 처음에 아저씨를 만났을 때는 목욕탕 안에서 누군가가 아저씨의 몸에 손을 대는 것조차 무척이나 싫어하셨다. 다른 중증장애인들이 봉사자들을 불러서 여기저기 때 좀 밀어 달라고 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샤워기 앞에 앉으셔서 조용히 자신의 몸을 닦으시고는 마무리는 꼭 다른 장애인을 불러 등의 때를 미는 것으로 끝내시는 아저씨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려 보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몇 번의 목욕봉사를 거쳐 장애인들 중에서도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는 것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지만 비장애인이 자신의 몸에 손대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에 조금은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봉사활동을 다니면서 아저씨는 나에게 늘 마음을 열 수 없는 무거운 상대였다. 그런 아저씨가 처음으로 마음을 여셨던 곳이 강원도 최북단이라는 명파리 해수욕장이었다. 하늘을 오르는 곧은 산 따라 출렁출렁 치장한 옷을 입은 울창한 숲을 타고 내려와 조용히 내려앉은 해수욕장은 보석처럼 숨어 있는 한적함이었다. 마치 아저씨와 나의 관계처럼….
여름은 촘촘히 익었건만 하늘은 온기를 품은 햇살 한 점 내려주지 않았다. 장애인 여름 휴양소에는 비만 오락가락하고 바람만 불어 바닷가에는 들어갈 엄두조차 내지 못할 파도만 밀려왔다. 그런 날씨처럼 모래 속으로 자꾸만 자신의 모습을 감추어 버리는 빗방울로 아저씨는 촉촉이 다가오셨다. 그 동안 이마에 땀방울을 달고 비탈길을 오르며 휠체어를 밀던 나의 숨찼던 시간들이 모두 날아가 버리는 느낌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건네진 말들은 마치 지난 중증장애인들과의 국토순례 행사에서 보았던 독립기념관 뒤편의 숲 속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시 어록의 글귀로 녹아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다 저 숲처럼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 건데 나는 그러질 못했어. 먹고 살겠다고 앞만 보고 달리다가 남에게 베푼 것 하나 없이 몸이 이 지경이 되고 마니까 남들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미안하더라고….”
버스가 지나가는 아흔아홉 구비 굽이진 길처럼 아저씨의 슬픈 이야기들은 조용히 나에게로 왔다. 사고 이후 몇 년 동안 바깥출입도 하지 않고 자신을 가두고 사셨다고, 목욕봉사나 국토순례 행사를 통해 만난 봉사자들을 통해서 조금씩 마음을 열어 오늘까지 올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어색한 듯이 다시 한 번 미안함과 고마움을 덧붙이시는 아저씨의 말씀을 따라 차창 밖에서 나에게 전해져 오는 숲은 보이는 그 모습 그대로의 장관뿐만이 아니라 향기까지 단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봉사활동을 통해서 나는 많은 가슴 아픈 분들을 보았다. 교통사고로 잘려진 다리를 붙잡고 잘려진 인생처럼 허무해하며 눈물을 흘리셨던 아저씨도 보았고, 양쪽 모두 없는 손목에 고무줄을 묶어 힘겹게 밥을 드셔서 늘 내 마음을 아프게 했던 아주머니도 보았다. 서로가 서로를 다정스럽게 챙겨주는 슬프면서도 따뜻함을 느끼게 해준 시각 장애인 부부도 만났다. 모두가 다른 아픔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숲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 숨쉬는 저 숲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수많은 나무와 풀과 작은 돌멩이에서 큰 바위까지 모두가 어울려 숲이라는 이름을 달고 산다. 무더운 여름 강원도 고즈넉한 바닷가에 민·관·군이 한마음이 되어 장애인이 쉴 수 있는 여름 휴양소를 만들었다. 어떤 사람은 나무가 되고, 또 어떤 사람은 풀과 작은 돌멩이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넉넉한 큰 바위가 되어 웃고, 서로를 보듬어 안던 시간들이 자꾸만 숲처럼 어울려 살자고, 해산처럼 넓은 숲을 만들며 살자고 하는 것만 같았다.
“여러분들 이렇게 먼 길 다니시기도 쉽지 않으실 텐데…. 언제 또 강원도에 올지 모르겠지만 이왕 여기까지 오신 김에 구경 많이 하시라고 잠깐 평화의 댐에 들렀다 가겠습니다. 괜찮으시지요?”
서울까지 가는데 열다섯 시간이나 걸린다는데 운전사 아저씨는 해산이 끝나갈 무렵 힘든 것도 잊은 채 새로운 숲을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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