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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청] 이쪽은 신라 산 넘으면 백제
  • 작성일2005-02-19
  • 작성자 /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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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00만년전, 동해의 해저 지각이 팽창하면서 한반도 지각을 밀어붙였다. 한반도는 대대적인 습곡 및 요곡 작용의 영향으로 융기했다. 이때 한반도 땅덩어리는 서쪽에 비해 동쪽의 지반이 더 높이 융기하여 동쪽으로 경사가 급한 동고서저의 경동(傾動) 지형을 이루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백두대간이 생겨났다. 지리산 또한 그 당시 전체적으로 융기하여 높이 솟아올랐다. 세석평전처럼 지리산의 능선 곳곳에 평탄하게 남아 있는 고위 평탄면들이 그 증거다.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동서로 밋밋한 모습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주능선 자락에는 남과 북으로 15가닥의 지능선이 펼쳐져 있고, 그 능선과 능선 사이에는 달궁 계곡, 심원 계곡, 뱀사골 계곡 등이 발달했다. 이 계곡들이 놓인 방향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북동~남서 방향을 취하고 있다. 어떤 연유일까?

한반도의 대륙 지각은 북서 방향으로 밀어붙이는 해양 지각인 태평양판의 횡압력을 받아 지각에 많은 구조선과 단층선이 형성되었다. 이때 금이 간 주(主)방향이 북동∼남서 방향이었으며, 이 금이 간 자리로 빗물이 흘러 지표를 깎아내 계곡을 이루었던 것이다.

지리산 북서쪽 노치마을에서 여원치·봉화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은 생활문화권을 구별시키는 경계선이었다. 동쪽의 운봉·인월·아영·산내는 역사적으로 신라에 속했으나 서쪽의 주천·이백·산동은 백제였다.
백두대간에 의한 문화권 구분을 오늘날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언어다. 백제였던 시내권은 전라 방언을 사용하지만, 신라였던 동부권은 경상 방언에 가깝다. 동부권은 경남 함양과 교류가 빈번해 아직도 경상도 억양이 남아 있다. 동부권 지역 주민들이 외지에 가면 경상도 사람이냐는 소리를 듣곤 한다.

사용 어휘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시내에서는 \\\'더워, 추워\\\'라고 말하는 반면에 동부권에서는 \\\'더버, 추버\\\'라고 한다.
운봉을 지나 인월로 조금 가면 왼쪽에 황산대첩비가 있는 화수리 비전마을이 있다. 비전마을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왼쪽에 황산이라는 작은 산이 있다. 황산은 운봉의 길목에 있는 산이고 운봉 평야지대를 제압할 수 있는 산이다.

고려 말에 함양·운봉을 노략질하며 인월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장수 아지발도 부대를 이성계가 이곳에서 섬멸했다. 이성계는 아지발도의 투구를 활로 쏘아 입을 벌리게 하고 그때 이지란이 활을 쏴 아지발도를 죽였다. 적장이 죽자 적의 기세는 단번에 꺾여 고려군들이 크게 격파했다. 황산대첩비는 왜구를 황산벌에서 크게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승전비다.

남원에서 함양으로 가는 국도에 백두대간상의 한 고개인 여원치가 있다. 황산대첩시 여원치에서 이성계 장군이 행군 도중 백발이 성성한 노파로부터 전승(戰勝)의 날짜와 전략을 계시 받았다. 그녀는 왜장 아지발도가 자신을 희롱하며 젖가슴에 손을 대자 칼로 가슴을 베어 자결한 원신(怨神)이었다.
후에 이성계는 노파가 산신령이라 여기고 이를 기리기 위해 벽에 여상(女像)을 새기고 산신각을 지었다. 지리산 산신령은 여자로 알려져 있고 이러한 산신령이 사는 곳을 여원(女院)이라 불렀고, 이곳을 여원치라 부르게 되었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을 풍수지리와 비교하자면 백두대간은 간룡(幹龍)에,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산줄기는 지룡(枝龍)에 해당된다. 본래 백두대간이라는 말과 풍수지리의 간룡이란 용어는 산을 나무에 비유한 줄기(幹)와 가지(枝)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나무는 줄기에서도 열매가 맺히지만, 대개는 가지에 열매가 맺힌다. 같은 이치로 풍수지리에서도 간룡보다는 지룡에 혈(穴)이 생긴다. 따라서 백두대간이 비록 큰 산줄기이지만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명당은 열매가 잔가지에서 맺히듯이 백두대간에서 다시 뻗어나온 가지에 생긴다. 지리산 북쪽 지역에도 백두대간에서 뻗어나온 가지에 명당이 남아있다. 주촌리에 구룡부주(九龍負舟 또는 黃龍負舟)라는 대명당이 있다는 기록이 \\\'남기록(覽奇錄)\\\'이라는 책에 전해지고 있다.

황룡부주라는 명당은 용이 배를 등에 지고 간다는 생김새의 명당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황룡부주의 명당은 광복 전에 이곳에 묘를 쓴 자손들이 크게 발복을 받았다고 한다. 용이 배를 등에 지고 항해를 하는데, 무게중심을 잃고 배가 등에서 떨어지게 되면 뒤집히므로 온 정신을 집중하여 배가 기울지 않도록 무게중심을 잘 잡고 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황룡부주의 명당에 석물(石物·무덤 주변에 돌로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돌조각)을 설치하면 배가 중심을 잃고 뒤집히기 때문에 이러한 명당에 석물을 설치하면 오히려 큰 피해를 보게 된다는 풍수지리 이론이 있다.

< 조선일보/월간 산 에코로바 백두대간 취재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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